KPI뉴스 - [차현진의 금융학교] 한국은행 생일찾기가 한국금융 과거사 청산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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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의 금융학교] 한국은행 생일찾기가 한국금융 과거사 청산인 이유

차현진 객원논설위원
기사승인 : 2026-06-09 14:30:13
대한민국 국회, 사법부, 행정부가 공인한 생일은 6월6일
창립기념일 6월12일은 구용서 초대 총재의 자축 행사일
조선은행의 친일 잔재와 한국은행 창립의 숨겨진 역사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1942년 6월 12일부터 시작한다. 안네는 13세가 되던 날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꿈 많은 문학소녀의 감수성을 담은 그 기록은 2년 만에 중단되었다. 안네는 나치에게 끌려가 유태인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뒤 1944년 사망했다.

바로 그 무렵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박용래라는 19세 문학소년이 시인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강경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조선은행 군산지점에 취직해서 많은 부러움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관동군의 전비 지원기관으로 전락한 조선은행이 그의 적성에는 도무지 맞지 않았다. 마침내 박목월과 상의한 뒤 조선은행을 사직했다. 시인의 길로 접어든 뒤 '저녁눈', '겨울밤' 등 오늘날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향토색 짙은 시들을 남겼다.

박용래 시인이 떠난 뒤 조선은행은 한국은행으로 환골탈태했다. 공교롭게도 안네 프랑크의 생일이기도 한 6월 12일이 한국은행의 생일이기도 하다. 그날 한은 총재는 창립기념사를 통해 메시지를 던진다. 금년 6월 12일은 신현송 총재가 취임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서 그의 메시지에 많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해서 6월 12일은 한은의 생일이 아니다. 한은 직원들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은의 생일은 1950년 6월 6일이다(당시에는 6월 6일이 현충일이 아니라서 영업일이었다). 그런 사실이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 근대사 바로잡기 차원에서는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친일 역사 청산'과 직결된다.
 

▲ 서울 중구 한국은행 전경 [KPI뉴스 자료사진]

 

출발점은 한국은행법이다. 그 법은 대한민국 최초의 금융법이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헌법과 정부조직법이 제정된 이후 국회는 신생 독립국 운영에 필요한 각종 법률을 부지런히 만들었다. 사면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시작으로 국회법, 국군조직법, 국적법 등이 만들어졌다. 경제와 관련한 법들도 다듬어졌다. 재정과 세금에 관한 것이 우선했고, 대한해운공사, 대한조선공사, 대한석탄공사 등 정부가 운영하는 독점 공기업에 관한 법률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에 이르자 국회가 금융에까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승만 정부는 미국한테 시달리고 있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주권 국가로 출범했지만, 자생력은 형편없이 낮았다.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판이었다. 미국은 원조를 지렛대 삼아서 아무 기반도 없는 최빈 신생국 한국의 국정 운영에 시시콜콜 간섭했다. 한국 정부가 말을 듣지 않는 경우 원조의 일부 또는 전부를 폐지한다는 조건을 '한미원조협정'(1948년 12월 10일, 제9조)에 담아두고는 경제협력처(ECA) 한국지부를 통해서 경제정책 전반에 개입했다. 미국의 요구사항 중 하나는 현대적 중앙은행 설립도 있었다. 일본에 대해 경쟁심을 가진 이승만 정부가 산업화에 과욕을 부리느라 돈을 함부로 푸는 것을 막기 위해서 견제 장치를 만들려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의도를 잘 알았다. 하지만 현대적 중앙은행 설립에는 흔쾌히 동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롤모델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최대 치적 중 하나가 미 연준 설립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에드워드 엘리어트 교수가 샌프란시스코 연준의 초대 이사를 지냈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연준식 중앙은행 설립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당시 일본과 중국의 위정자들은 중앙은행 독립성 개념이 생소하거나 생리적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과 크게 달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심지어 한국은행법 제정을 위해서 외국 전문가를 초빙하는 것까지 허락했다. 그리하여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이 1950년 5월 5일 국회를 통과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일반 법인은 상법에 따라 법원에 설립 등기를 마친 뒤 법인격을 갖게 된다. 그런데 한국은행법은 상법이 아니다. 그런 혼란 때문에 대법원은, 국회가 한국은행법을 제정한 직후인 5월 23일 규칙 제1호를 공포했다. '한국은행등기처리규칙'인데, 그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상법에 의해 설립되지 않은 한국은행의 본점과 지점이 전국 법원에 설립 등기를 신청하면, 일반 상법의 절차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라는 대법원장의 지시였다. 중요한 것은, 대법원이 한국은행의 출범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특별법을 통해 먼저 출발했던 대한해운공사, 대한조선공사, 대한석탄공사에 대해서는 그런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편 같은 날 재무부도 '한국은행법시행령'을 제정했다. 최초의 한국은행법(제113조)에서는 한국은행의 설립과 업무개시일을 행정부가 결정하도록 했는데, 재무부는 출자금을 완납하는 날을 기점으로 삼았다(최초의 한국은행법시행령 제6조). 그리고 6월 6일 15억 원의 출자금을 완납했다.

이런 과정을 보면, 대한민국 국회, 사법부, 행정부가 공인하는 한국은행의 생일은 1950년 6월 6일이다. 그래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6월 9일까지 세 번의 회의를 거쳐 정관과 조직, 그리고 임직원 임명을 의결했다. 만일 그때까지도 조선은행 체제가 계속되었다면 즉 6월 12일이 한국은행 설립일이었다면, 세 번의 금융통화위원회는 무효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6월 12일은 누가 정한 생일인가? 구용서 초대 총재다. 구용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즉 을미사변의 주범 구연수의 장남이다.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을 경복궁 명성황후의 침소로 안내한 뒤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불태우는 작업을 지휘했다. 그 뒤 공범 우범선과 함께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귀국하여 조선총독부 고위 경찰 간부를 지냈다.

그런 아버지를 둔 '덕분'에 구용서는 구하라 이치로(具原一郞)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자랐다. 그리고 도쿄상과대학(현재의 히토츠바시대학)을 졸업한 뒤 1925년 조선은행에 취직했다. 경제공황 때문에 조선은행은 수년째 직원을 전혀 채용하지 않았지만, 그해에만 구용서만 단독 채용한 뒤 도쿄 본부에서 근무토록 배려했다(일본인 직원도 뽑지 않았다). 그래서 구용서는 조선은행 안에서 위아래 10년 동안 선후배가 없었다. 경쟁자가 없으니까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함께 자란 노다 미에코(한국명 송지혜, 을사오적 송병준의 손녀)와 결혼했다.

해방이 되자 조선은행의 일본인 간부들이 급히 일본으로 도주했다. 반면 도쿄 본부에서 근무하던 구용서는 서울로 복귀해야 했다. 졸지에 조선은행 안에서 최고령, 최고위 직원이 되었다.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의 인력, 조직, 재물을 승계하게 되자 졸지에 초대 총재 0순위가 되었다.

그쯤 되자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윤색할 필요가 생겼다. 우장춘 박사(친일파 우범선의 장남)와는 이종사촌이고 우장춘의 어머니는 일본인이라는 것을 세상이 다 아는데도, 구용서는 자기 어머니가 한국인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우겼다(자신이 죽을 때까지). 을미사변 이후 아버지 구연수는 고종 황제의 사살 명령을 피해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구용서는 자기 고향이 부산의 낙동강 갈대숲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야 한국인 어머니 설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구용서 조선은행 총재를 초대 한은 총재로 임명했다. 구용서는 초대 한은 총재로 임명받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꾸몄다. 조선은행의 재무건전성을 과대포장한 것이다.

1941년 진주만 습격 사건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에게 일본 관동군 지원을 명령했다. 닥치는 대로 돈을 풀었기 때문에 조선은행은 부실은행 그 자체였다. 그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의 결산을 중단시켰다. 일제강점기 말 조선은행의 부실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1950년 조선은행의 자산과 부채를 승계하는 한국은행이 출범할 때 반드시 그간의 부실을 평가해야 했다. 하지만 구용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앙은행 자격을 두고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현재의 한국산업은행)이 치열하게 다투는 판에 조선은행의 부실이 심각하다는 것이 밝혀지면 구용서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조선은행을 폐쇄시킨 뒤 원점에서 중앙은행을 출범시킬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구용서는 중앙은행 총재의 자리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구용서는 자신이 인계자이자 인수자로 지정된 조선은행-한국은행 간 인수인계서에서 마치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꾸몄다. 전국에 걸쳐 약 1주일 동안 약식으로 진행된 자산과 부채의 실사 절차는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꾀를 부렸다.

일제강점기에 상업은행 기능을 갖고 있었던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 되려면, 상업은행 기능과 조직이 방출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조선은행에서 상공은행이 스핀오프(spin-off)되었다. 상공은행은 조선은행 안의 모든 부실을 떠안은, 일종의 배드뱅크다. 오늘날 롯데백화점 명품관(에비뉴엘) 자리에 있었던 상공은행은 온갖 부실을 떠 안은 채 한국전쟁을 맞았다. 그러니 출범한 지 2년도 되지 않아서 한국전쟁 중에 흔적도 없이 파산했다. 그러는 바람에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만일 상공은행이 어느 정도 부실했는지 밝혀줄 자료가 남았다면,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한국은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국교정상화를 위해 대일청구권을 논의할 때 가장 큰 쟁점은 한일 양국의 금전 채무였다. 현물 반환(일본이 수탈해 간 국보급 문화재와 선박)과 인적 피해(강제징용 관련 체불임금과 사망위로금)는 기준도 모호했고 계산도 어려웠다. 반면 일본 국채 등 조선은행이 가진 자산과 부채는 계산하기가 쉬웠다. 그때 만일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의 부채가 자산보다 훨씬 많은 상태라는 기록이 있었다면(그래서 해방 직후 한국이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증거로 제시되었다면), 한국은 일본에게 요구할 금액이 훨씬 클 수 있었다.

그런데 구용서의 흐리멍덩한 계산 덕분에 모든 것이 지워졌다. 그것이 아버지 구연수에 이어서 아들 구용서가 우리 국민들에게 지은 큰 죄다. 그것이야말로 지독한 친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구용서는 한국은행법이 통과된 뒤 자신의 잠재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데 집중했다. 대구 출신의 10년 후배 박숙희 이사가 대표적이었다. 만능 운동선수였던 박숙희는 호방한 성격 때문에 조선은행 안에서 따르는 직원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도쿄에만 머물렀던 구용서보다 훨씬 인맥이 두터웠다. 그래서 구용서는 조선은행 폐지와 동시에 그 부실 자산을 인수하는 상공은행의 임원으로 박숙희를 방출했다. 그날이 바로 6월 12일이었다.

그러니까 6월 12일은 조선은행 직원 중에서 일부를 상공은행으로 방출한 뒤 구용서가 남은 직원들과 잔치를 벌인 날이다. 그날 해군 군악대까지 동원해서 성대한 파티를 벌였다. 그것이 한국은행 설립을 둘러싼 진실이다.

결론적으로 6월 12일은 구용서가 자축연을 벌인 날에 불과하다. 법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정통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치졸하기까지 하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인기가 높아서 유능한 직원들이 몰렸던 영업부 직원들을 축출한 날이다. 한국은행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이라면, 국회와 행정부가 지정한 6월 6일을 생일로 기념해야 한다. 70년이 넘도록 6월 12일을 기리는 것은, 친일파의 후손인 구용서의 계산에 말려드는 일이다.

참고로 필자는 한국은행 직원으로 근무할 때부터 그 문제를 내부에서 제기해 왔다. 하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2011년 김중수 총재와도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김중수 총재는 "출생의 비밀을, 외부 출신인 내가 밝히라고? 한은 출신이 스스로 해결해야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손사래를 치셨다.

그러면 대한민국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출발을 둘러싼 문제는 도대체 누가 해결하나? 박용래 시인이 흠모했던 이육사 시인의 말처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려야 하나? 지금은 일제강점기가 아니지 않은가? 답답하다. 국가나 사람이나, 과거를 눈감는 것은 미래를 눈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임 신현송 총재께서 내년부터는 제발 6월 6일을 생일로 알고 행사를 치르기를 고대한다. 그럼으로써 한국은행에서 조선은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거둬진다.

  

▲ 차현진 객원논설위원

 

● 차현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중앙은행과 금융제도 전문가다. 38년에 걸친 한국은행 근무 기간 중 통화정책과 경제조사, 금융제도 등을 깊이 연구했으며, 2년의 예금보험공사 이사 경험을 통해 금융안정과 예금자보호를 다루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Wharton School) MBA △1985년 한국은행 입행 △ 2003년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 2005년 미주개발은행(IDB) 컨설턴트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장, 기획협력국장, 커뮤니케이션국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 역임 △2023년 예금보험공사 상임이사 △2025년 가을 호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KPI뉴스 / 차현진 객원논설위원 cha@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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