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서울 종로에 진료소 연 최초의 근대 개업의
대정친목회, 내선융화 운동 등 벌이며 일제 기대에 부응
안상호 가정, 총독부 기관지에 일선동화 모델로 소개돼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의 증조부 안상호(1872~1927)의 친일 행적 의혹이 논란이다. 하영이 7일 방송된 KBS 2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증조부부터 4대째 의사라는 집안 내력을 공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논란이 일파만파 번지는 분위기다.
하영 소속사는 10일 "사실무근"이라며 의혹을 부인했다가 하루 만에 태도를 바꿨다. 안상호 이름이 1916년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있는 기록을 확인했다며 11일 사과했다. 12일에는 하영이 SNS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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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 하영이 6월 29일 서울 강남구 폴렌느 서울에서 열린 아틀리에 오픈 기념 포토 행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 |
안상호는 2005~2009년에 활동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1006명에 포함된 사람이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친일 행적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대정친목회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몇몇 기사에 언급된 대로 대정친목회는 친일 단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기보다는 이 단체에 대해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07년에 나온 역사학자 이정은 논문(최초의 근대 開業醫 安商浩의 생애와 활동)과 장신 논문(대정친목회와 내선융화운동)을 제외하면, 대정친목회나 안상호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 성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두 논문 내용을 중심으로 안상호와 대정친목회 문제를 살펴보자.
안상호는 4세 때 역참 관리인 부친을, 10세 때 모친을 여의었다. 8명으로 추정되는 형제자매도 모두 어릴 때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고아가 된 안상호를 돌봐주던 숙부마저 안상호가 14세 때 사망했다.
어렵게 생활하던 안상호는 18세 무렵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23세 때인 1895년 관립일어학교에 입학했다. 1898년에 졸업한 후 국내에서 일어학교 교관으로 일하는 대신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 자격이었다.
1902년 일본에서 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성공한 유학생의 모델로 여겨졌다. 1906년 일본에 온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을 진료한 것을 계기로 삶의 경로를 바꿨다. 귀국을 종용하는 의친왕의 뜻을 받아들여 190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전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서울 종로에 진료소를 연 최초의 근대 개업의가 됐다. 진료소는 환자로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잘됐다. 서울 각지의 부자들은 안상호를 자기 집으로 초치해 진료를 받았다. 안상호는 황실 촉탁의로서 고종, 순종, 의친왕 등도 진료했다. 황실 촉탁의로 일하는 동안 의료 봉사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 강점기에도 안상호는 여전히 잘나가는 의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적잖은 한국인의 눈 밖에 나는 처지가 된다. 그 계기 중 하나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18년 12월 10일 자 기사가 거론된다.
3·1운동 석 달 전, 매일신보 기자의 안상호 집 방문기였다. 기사에서 안상호는 "전연(全然)히 내지화한"('완전히 일본화한'이라는 뜻) 의사, 안상호의 집은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 됐음을 보여주는 "일선동체(日鮮同體)의 가정"으로 표현됐다.
안상호는 기자에게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갓지요(일본 사람과 똑같지요)", "지금 됴션 옷은 한 벌도 업슴니다(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음식도 매운 것은 죠곰도 못 먹어요(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어요)"라고 말했다. "됴선 사람과 그리 샹죵하난 일이 업슴으로 불편한 것은 업서요(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어요)"라는 얘기도 했다(괄호 안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오늘날 표기법에 맞춰 조정한 내용).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선전하고 싶어 한 '모범 가정'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역사학자 이정은은 안상호 가정이 이처럼 일선동화(日鮮同化)의 모델케이스로 꼽히면서 한국인의 미움을 사게 됐다고 지적했다.
기사에는 앵정소학교에 다니는 안상호의 큰딸도 등장했다. 앵정소학교는 재한 일본인 자녀를 위해 서울에 설립된 공립학교였다. 이에 대해 이정은은 안상호 부인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면이 있지만 일반인 눈에는 곱게 보일 수 없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대정친목회 간부진에 합류한 것은 이 매일신문 기사가 실리기 2년 전이다. 대정친목회는 1916년 11월 창립된 친일 단체로, 정확한 해산 시점은 확인되지 않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 이뤄진 간부진 변화 상황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창립 당시 간부진은 회장단 3명, 이사 9명, 평의원 21명이었다. 간부진의 다수는 한국인이었지만 일본인도 일부 있었다. 평의원 21명 중 3명이 의료인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안상호였다.
회장은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1910년 일본의 강제 합병에 찬동해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으로 지탄받은 조중응이었다. 평의장 한상룡은 이완용의 외조카이자 주로 금융 분야를 중심으로 활동한 친일파였다. 저명인사였던 친일파 윤치호도 안상호와 같은 평의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대정친목회는 창립 후 몇 차례 간부진에 변화가 생기는데 이완용, 민영휘 같은 거물 친일파도 나중에 간부를 맡게 된다.
대정친목회라는 명칭은 당시 일본 군주이던 다이쇼(大正, 대정) 천황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목회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단순한 친목 단체가 아니었다. 1920년대에 내선융화(일본과 조선이 갈등 없이 화합하고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는 뜻) 운동을 벌였고, 안상호 사후인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대륙 침략을 옹호하고 창씨개명을 환영했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총독부가 특별히 창립을 허가한 단체였다. 3·1운동 이전에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앞세워 한반도를 무단 통치하며, 한국인의 단체 결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이래 처음으로 일제가 한국인에게 결성을 허가한 단체가 바로 대정친목회다.
대정친목회는 내선융화 운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일제의 기대에 부응했다. 역사학자 장신은 대정친목회가 그러한 활동의 결과로 당대에 "친일의 중심 기관", "친일 단체의 중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대정친목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선정 기준 해제'에 명시된 친일·전쟁 협력 단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정친목회 등의 주요 친일 단체에서 핵심 간부로 활동한 자, 임원직을 중복 역임한 자는 수록 대상이라는 내용이다.
안상호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이 사전 편찬위원회가 안상호의 직위가 회장·부회장이나 이사가 아닌 평의원이었던 점, 간부진에 이름을 2번 이상 올리지는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해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안상호가) 당시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비해 적극성과 반복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해서 수록 기준에 맞지 않아" 등재되지 않았지만 "친일파가 맞다"고 13일 YTN 라디오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면서 1909년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대회 준비위원회에 안상호가 이름을 올린 사실 등을 공개했다.
한 가지 더 짚을 것이 있다. 이른바 의료 명문가라는 규정이다. 안상호 관련 논란이 번지면서, 하영의 부친이 과거에 딸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글이 재조명됐다. 2002년 한 일간지에 실린 이 글에서 하영의 부친은 "우리 집안은 몇 안 되는 의료 명문"이라고 딸에게 설명했다. 하영이 집안 내력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의료 명문가는 "친일의 중심 기관" 대정친목회 평의원이었던 안상호 집안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다. 명예로운 칭호를 얻어야 할 의료인은 대정친목회 평의원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이다.
소수이지만 그런 의사들이 실재했다.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중 한 명이자 만주 등지에서 다친 독립군을 치료한 김필순(1878~1919), 만주에 병원을 세우고 독립운동과 의료 활동을 병행한 박서양(1887~1940) 등이 그에 해당한다. 김필순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의 처남이고, 박서양은 1898년 독립협회가 주관한 관민공동회에서 인상적인 연설을 한 백정 박성춘의 아들이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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