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리뷰] "견고한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 사랑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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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견고한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 사랑이 남았다"

이성봉
기사승인 : 2019-05-03 14:04:58
김광보 연출 오페라 '베르테르'를 보고

김광보 연출의 첫 번째 오페라 연출작 '베르테르'가 1일 세종문회회관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작품은 김광보 연출의 첫 번째 오페라 도전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김 연출은 자신의 100번 째 무대작으로 익숙한 길을 걷기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이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았음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 베르테르역에 테너 신상근, 샤를로트역에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번 오페라는 배경이 되는 시대를 현대로 삼았다. 괴테가 살던 시대가 아닌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로 베르테르를 소환했다. 그 시대의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절대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화석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사랑의 참 의미를 오늘날 베르테르를 통해 보고자 했을까?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한 까닭은,
죽음 앞에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대는 온통 유리로 둘러 쌓여있다. 유리를 통해 베르테르와 샤를로트의 내면을 보고자 했다고 한다. 샤를로트는 청순가련형의 여인은 아니다. 오히려 치명적, 혹은 격정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 것 같다.


▲ 샤를로트가 사는 집과 전체 무대는 유리로 둘러 쌓여 있다. 투명한 유리를 통해 샤를로트와 베르테르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도록 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무도회장으로 샤를로트를 데려 가는 베르테르는 짧은 시간에 그녀의 매력에 빠져버린다. 봄은 너무 짧다. 언제 폈는지 모를 꽃들이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있다. 베르테르에게 사랑은 한여름 뇌우 같은 것이었다. 요란하게 닥쳤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가을. 세상은 온통 낙엽으로 뒤덮혀 있다. 희망도 없다. 마지막 잎새가 지고,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영영 이별하리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베르테르의 편지는 샤를로트에게 소복소복 쌓이는 눈과 같다. 새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눈이 태산을 덮는다.  읽고 또 읽는 편지…견고해 보이던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 사랑이 남는다. 눈의 무게와 사랑의 무게는 그런 것이다. 베르테르가 택한 것은 그녀의 행복이며 마지막 순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베르테르가 알베르(공병우)와 샤를로트가 결혼해 사는 모습을 지켜 보며 괴로워하다 떠난다. 가을의 쓸쓸한 모습을 무대에 담았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오페라는 사계절을 모티브로 삼아 진행된다. 영상으로 표현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이미지는 주인공의 감정선을 보여준다. 꽃이 피고 푸르름이 더하고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것이 베르테르와 샤를로트의 내면을 따라 흘러간다.

국내 오페라는 짧은 기간 공연하기 때문에 무대에서 장치를 설치하고 리허설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서울시오페라단 이경재 예술감독은 이번 공연을 이틀 전에 언론에 무대를 공개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사전 리허설 무대임에도 학생 관객을 참여시켜 현장감 있는 공연처럼 프레스 시연회를 한 것도 특징이었다. 이런 효과가 첫 공연을 통해 오롯이 발휘되었다. 베르테르의 신상근과 샤를로트의 김정미 등 연기자들의 호흡도 안정감을 보여줬다. 목소리와 느낌, 몸짓으로 표현된 감동은 온전히 객석으로 전해졌다. 특히 피날레 장면은 프레스 시연회와는 달리 베르테르의 죽음과 샤를로트를 이어주는 조명으로 여운을 남기게 했다.


▲ 마스네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장면인 3막 '오시안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노래이다. 베르테르의 아리아 '어찌하여 나의 잠을 깨우는가, 봄바람이여'는 샤를로트를 향한 베르테르의 고뇌와 사랑이 범벅되어 폭팔하는 이 오페라의 백미이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김 연출은 "배우들의 연기가 기대만큼 따라와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목마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서로 힘든 가운데도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무대미술가인 신선희 전 국립국장장은 이번 작품에 대해 "여태껏 세종문화회관에서 본 오페라 중 가장 좋은 작품으로 생각된다"며 "군더더기 없는 진행과 깔끔한 무대, 성악가들의 높은 기량에 감동을 받았다"고 평했다. 이날 오페라를 관람한 각국 대사들도 "한국 성악가와 오페라 무대 수준에 대해서 다시 평가하는 기회가 되었다"며 "한번 다시 보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양진모가 지휘한 70인조의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예술감독 마시모 자네티)는 풍부한 음악으로 감미로운 선율로 오페라를 잘 표현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힘을 보여주는 무대였다.

아쉽게도 공연은 두 번의 무대만을 남기고 있다. 국내 오페라의 제작 여건상 앵콜 공연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KPI뉴스 / 이성봉 기자 sblee@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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