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매각 제한…노조, 완전한 승리라 보기 어려워"
"현금으로 풀렸다면 부동산·물가·임금 도미노 우려도"
"단순한 노사 게임 아냐…AI 시대 배분 질서의 첫 충돌"
"제가 볼 때는 회사도 이긴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달 극적으로 타결된 삼성전자 노사 협상 결과에 대한 박정일 전 한양대 겸임교수의 촌평이다. 시장에서는 노조의 판정승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그의 진단은 달랐다. 노조가 이기고 사측이 진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은 DS부문(Device Solutions,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총괄 부서) 기준으로 1인당 최대 6억 원에 달하는 성과급을 이끌어내며 '사상 최대의 보상 쟁취'라고 자평했다. 박 전 교수의 시각은 달랐다. 박 전 교수가 주목한 것은 '지급 방식'이다.
"표면적인 숫자는 6억 원이지만, 이는 현금이 아닌 '자사주'로 지급됐습니다. 게다가 일정 기간 매각이 제한되는 구조죠.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현금이 아닐뿐더러 주가 변동 리스크까지 노동자가 떠안은 셈입니다. 반면 회사는 대규모 현금 유출 부담을 방어하는 동시에, 핵심 인재들을 장기간 묶어두는 강력한 '황금 족쇄'를 채우는 실리를 챙겼습니다."
삼성SDS 도쿄사무소장과 경제위기관리연구소 부소장 등을 거친 박 전 교수는 최근 AI 시대의 새로운 보상 체계를 다룬 책 '삼성 초격차 노사혁명'을 출간했다. 그는 삼성전자 성과급 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이재용 회장 자택 앞 노조 농성 현장을 직접 찾기도 했다. 자신이 고안한 'AI 기반 초과이익 배분 모델'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박 전 교수는 "배가 부른 거지. 관둬라"며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AI 기반 초과이익 배분 모델'이 무엇일까. 11일 서울 강남 한 카페에서 박 전 교수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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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일 전 한양대 겸임교수가 11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KPI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상진 기자] |
— 노조는 사상 최대 보상을 쟁취했다고 자평한다. 그런데 이긴 것이 아니라는 건가.
"노조가 성과를 얻은 건 맞습니다. 성과급 상한 폐지, 장기 지급 구조는 이전과 비교하면 의미 있는 진전이에요. 그런데 성과급을 현금이 아닌 자사주로 줬습니다. 자사주는 주가가 오르면 이익이 커지지만, 반대로 떨어지면 가치도 줄어듭니다. 매각도 3분의 1씩 순차적으로만 가능하게 묶여 있어요. 회사는 현금 유출 부담을 줄이고 주가 변동 위험 일부를 노동자에게 넘긴 겁니다. 이직하고 싶어도 이 구조 때문에 쉽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노조가 당한 셈이죠."
ㅡ '노조가 이겼다'고 말하려면 현금으로 받았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노동자 입장만 보면 그렇습니다. 현금은 받는 순간 확정된 소득이고, 주가 변동 위험이 없어요. 그런데 국가경제 전체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만약 삼성전자 성과급이 대규모 현금으로 한꺼번에 풀렸다면 상당한 파장이 생겼을 겁니다. 평택, 화성, 용인, 동탄 일대 부동산 시장에 압력이 돼요. 자동차, 명품, 외식 가격에도 영향을 줬을 거예요. 더 큰 문제는 다른 기업 노조의 기준점이 된다는 겁니다. 삼성이 사례를 만들면 SK하이닉스, 현대차, 카카오로 '우리도 영업이익 N%를 현금으로 달라'는 요구가 확산될 수 있습니다."
ㅡ 그렇다면 삼성전자의 이번 노사협상을 종합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
"누가 이겼다고 볼 것이 아니라 양측이 각자의 리스크를 교환한 협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회사는 성과급 일부를 양보한 대신 생산 안정성과 시간이라는 훨씬 큰 가치를 확보한 것이라고 봐요. 지금 삼성은 HBM·AI 반도체 경쟁, TSMC 추격 등으로 엄청난 전쟁을 치르고 있어요. 이런 와중에 장기 파업이 발생하면 손실은 성과급 규모보다 훨씬 커질 수 있습니다. 노조는 성과급을 얻었지만 주가와 장기 성과에 연동되는 구조를 받아들였습니다."
— 이번 사태가 남긴 교훈이 있다면.
"저는 이번 사태를 AI 시대 초과이익 배분 전쟁의 첫 충돌로 봅니다. 진짜 문제는 성과급 액수가 아니라 신뢰 시스템이에요. 삼성은 무노조 경영을 폐기했지만 그 이후 새로운 노사 시스템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직원들은 '왜 이 금액인가', '왜 저 사업부는 더 받고 우리는 덜 받는가', '성과급 산정 방식은 정말 공정한가' 등을 묻습니다. 삼성은 여전히 EVA(경제적 부가가치), OPI(초과이익분배금) 같은 과거 방식을 씁니다. 직원 입장에서는 왜 이 금액이 나왔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노조도 내부 사업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할 구조가 없었어요."
— 일각에서는 단지 삼성의 노사 문제를 넘어 국가가 개입해야 할 문제로 봤다.
"삼성전자는 단순한 회사가 아닙니다. 반도체, 수출, 협력업체, 국민연금, 주주까지 모두 얽혀 있어요. 이재명 대통령이 '영업이익이 아니라 당기순이익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한 데도 일리가 있습니다. 영업이익 N%를 기계적으로 배분하면 세금, 투자 여력, 주주 몫이 확정되기 전에 노동자가 먼저 가져가는 구조가 됩니다. 반대로 당기순이익만 기준으로 하면 환율이나 일회성 손실에 따라 현장 성과와 괴리가 생깁니다. 단순한 노사 게임이 아니었던 거죠. 노동자, 주주, 협력업체, 국민연금, 국가 산업전략이 모두 얽힌 새로운 배분 질서의 충돌이었어요."
— 같은 요구를 두고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향한 여론 온도가 달랐다. 왜 그런가.
"삼성전자는 국민기업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SK하이닉스는 상대적으로 반도체 단일기업 이미지가 강한 반면 삼성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직원 보상'이 아닌 '국민기업의 초과이익을 누가 가져가느냐'는 문제로 확대된 거죠. 또 하이닉스에서는 '성과급 제도화' 프레임이 먼저 깔렸어요. 반면 삼성은 노조 요구의 정당성이 충분히 설명되기 전에 'DS부문 평균 6억'이라는 숫자가 먼저 부각됐습니다. 그 숫자가 국민에게 박탈감을 줬습니다."
— 저서에서 JM·PSI·IPS 같은 보상시스템 방식을 제시했다. 어떤 개념인가.
"'설명 가능한 성과급'으로 바꾸자는 겁니다. 요즘 축구 중계를 보면 손흥민이 드리블을 몇 미터 했고, 김민재가 얼마나 뛰어서 수비했는지 AI 분석 결과가 다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회사에서도 직원별 기여도를 이렇게 측정하자는 거예요. 옛날엔 팀장이 일방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팀장과 사이가 나쁘면 아무리 잘해도 낮은 점수를 받던 시대였어요. 이제는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배분 기준을 투명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원 입장에서는 '회사가 마음대로 정했다'가 아니라 '내 기여도가 이렇게 반영됐다'고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 이번 사태가 다른 산업으로 번질 것으로 보나.
"도미노처럼 연쇄적 영향을 끼칠 겁니다. 그때부터는 개별 기업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산업 시스템 전체가 바뀌는 사건입니다. 삼성 합의는 단순한 노사 협약이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 질서 변화의 신호탄일 수 있어요."
KPI뉴스 / 한상진 기자 shiraz@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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