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에 대한 부정적 단정 경향 강한 한국…일면적 평가
5·18민주화운동 폄훼·왜곡 비판 쏟아지는 이진숙 주최 행사
'돈키호테, 약자 편에 서서 정의 추구하려 한 인물' 기억해야
1571년 스페인·베네치아 등의 연합 함대는 지금의 그리스 서부 레판토 근해에서 오스만튀르크 함대를 격파했다(레판토 해전). 승전국 통치자들은 축배를 들었지만, 일선에서 적과 대치한 군인 중 상당수는 그럴 수 없었다. 격전 중 죽거나 크게 다친 이가 적지 않았다.
스페인 해군으로 참전한 한 24세 남성은 총상으로 평생 왼손을 쓰지 못하게 됐다.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대 후 귀국하던 중 해적에게 잡혀 아프리카 북부 알제리에서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5년 만에 해적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나지만, 귀국 후 삶도 만만치 않았다. 불운이 겹쳐 옥고를 몇 차례 치러야 했다.
1605년, 신산한 세월을 견디고 58세가 된 이 남성은 한 권의 소설을 세상에 선보였다. 소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0년 후, 남성은 이 소설의 속편을 세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616년 생을 마감했다. 스페인의 문호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 '돈키호테'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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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의힘 이진숙 의원이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공개 포럼 관련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이 행사 후 이 의원을 돈키호테로 규정하는 지적이 나왔다. [뉴시스] 2026.08.14. |
소설 '돈키호테'는 세계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많은 후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을 "모든 소설의 어머니", "인류의 바이블"로 예찬한 이들도 있다.
세계 주요 언어로 모두 번역돼 오랫동안 읽히고 있는 스테디셀러인 만큼 작품 해석도 다양하다. 시대와 사조의 변화에 따라 주인공 돈키호테도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에 따르면 18세기 합리주의자들 눈에 돈키호테는 이성이 결여된 바보로 비쳤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에게 돈키호테는 불완전한 세계와 싸우는 고귀한 이상주의자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돈키호테를 낡은 봉건적 가치에 집착한 채 몰락해가는 귀족으로, 실존주의자들은 능동적으로 운명을 선택하는 개인의 표상으로 여겼다.
이것만이 아니다. 돈키호테를 유토피아주의자로 높이 평가하거나,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성스러운 바보로 바라본 이들도 있었다. 당대의 계급 질서와 종교 등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소설 속 구절에 비중을 두고 이 작품과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를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해석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인정한다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돈키호테가 과부, 고아, 빈민 같은 약자를 못살게 군다고 여겨지는 '악한 존재'와 맞서 싸우려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착각에 빠지고 실수를 범하고 조롱당하는 것 등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힘없는 이들 편에 서서 정의를 추구하려 한 돈키호테의 동기까지 부정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돈키호테를 부정적 인간형으로 단정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목숨을 걸고 약자를 지키는 정의로운 인간' 돈키호테의 진정성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엉뚱하게 해석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하는 연구자도 있었다. 돈키호테를 부정적 인간형으로 단정하는 경향은 세계 학계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일면적 평가라는 점에서도 아쉬운 면이 있다.
근래 돈키호테가 한국 정치판에 소환됐다. 계기는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이 13일 극우 성향 인사들을 불러 국회에서 연 '5·18민주화운동의 재조명' 포럼이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1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 행사를 비판하면서 이 의원을 겨냥해 "시대정신을 망각한 돈키호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어 16일 한 일간지는 이 의원을 "돈키호테 같은 악당"으로 규정하는 칼럼을 게재했다. 이 의원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기 때문에 돈키호테 같은 악당이라는 것이었다.
이 의원 주최 행사는 5·18민주화운동을 폄훼·왜곡했다는 비판을 각계에서 받고 있다. 타당한 비판이다. 홍 전 시장 글 및 이어진 일간지 칼럼에서 이 의원 주최 행사의 그러한 면을 지적한 부분 역시 상식에 부합한다.
다만 '이진숙=돈키호테' 규정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의원의 행보는 물론 이 의원과 뜻을 함께한 행사 주요 참석자들 면면 어디에서도 약자 편에 서서 정의를 추구하려 한 돈키호테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힘없는 이들을 위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성스러운 바보 같은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 의원 같은 정치인에게 습관적으로 '돈키호테'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적절한 비판이 아니다. 약자를 위해 무모하게나마 칼을 들었던 인물과 역사적 피해자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 정치인을 같은 이름으로 묶을 수는 없다.
이진숙 의원을 돈키호테라 부르는 것은 세르반테스에 대한 실례를 넘어 돈키호테에 대한 오독이다. 돈키호테에게는 적어도 약자를 향한 연민과 정의를 향한 열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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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련 기자 |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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