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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도시의 또 다른 세계, 지하도로를 걷다

UPI뉴스
기사승인 : 2019-01-17 11:13:49
을지로 지하상가
▲ 서울 중구 을지로입구 지하도 [정병혁 기자]

 

바쁘다고 무료할 틈이 없는 건 아니다. 한 가지 일을 끝내고 다음 일을 시작하기 전, 이제 막 끝낸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로 빠져들기 전, 피곤하고 나른하지만 약간 무료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마 그런 오후였을 것이다. S에게서 카톡이 왔다. S의 연락이 없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라며 몇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을지로입구 ‘아크앤북’에서 만나 을지스타몰을 걸었다. 2013년 8월부터 을지로지하상가를 을지스타몰로 개칭했다. 


지하도로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만쥬 가게에서 나는 냄새였다. 이제 막 산책을 시작했는데 먹는 유혹에 빠질 수 없었다. 산책이 끝나면 모를까. 그때 떠오른 곳이 광장시장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목적지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 아닌 광장시장으로 바꿨다. 산책의 묘미는 즉흥성이다.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 흥미로운 것을 만나면 언제든 목적지를 바꾸는 것이다. 도시에 살면서 목적 없이 돌아다니기 어렵다. 목적이 있어야 집을 나서고 일단 집을 나서면 목적지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한다. 주변을 기웃거릴 필요도 없고 그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다. 목적 없는 것은 산책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물품보관소를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오르자 양쪽으로 상가가 이어진다. 한 가게 앞의 유리창 앞에 다가가 낯선 기계들을 구경한다. 기계 앞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를 알려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주차기록기, 순찰시계, 수표발행기, 출퇴근 기록기, 출퇴근 지문 인식기, 문서 세단기 등. 새제품과 중고제품이 뒤섞인 가게 안에는 그 밖에도 어디에 사용하는지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하상가에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메뉴의 식당이 많았다. 컵밥, 유부초밥, 샌드위치, 일본 라멘 등 한 가지 메뉴에 집중한 식당이 대부분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 가게 앞에 적힌 문구를 읽는다. “오늘 좀 힘들었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내일도 어차피 힘드니까요.” 별다른 설명은 없는데 희망없는 오늘을 살고 있는 청년들의 하소연처럼 느껴졌다.

 

▲ 을지로 지하상가 [정병혁 기자]


트로피와 인쇄물을 파는 가게를 지나 꽃가게가 있다. ‘수작 걸기 좋은 날’이라는 광고 카피에 끌려 다가가 보니 커피클래스, 마크라메, 캘리그라피, 전통 매듭 등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마크라메가 뭔지 몰라서 검색해보니 실매듭을 말한단다. 가게에서는 여러 강좌가 수시로 열리는 모양이었다.

전자담배, 모치도너츠, 유명메이커 땡처리 가게, 문구점, 편의점, 카페를 지나자 을지지하상가 전체를 보여주는 안내판이 보였다. 상가를 시청광장 구역, 을지스타몰 2구역, 3구역, 4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카레와 모밀 종류가 유리에 적힌 ‘동경정원’은 벌써 영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롤스크린으로 3분의 2쯤 가려진 가게 안은 불이 켜져 있고 테이블 위는 단정히 세팅되어 있다. 


자연화장품 전문점, 팸플릿과 현수막 인쇄소, 카메라 가게를 지나 S와 나는 그림을 파는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저 그림 좋아하는데. S는 클림트의 ‘키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게에는 클림트의 ‘키스’ 뿐만 아니라 고흐와 모네의 그림 복사품도 진열되어 있었다. 표구와 배접, 그림 액자 맞춤까지 하는 가게였다. 몇 걸음 옮기니 옛날 사진을 복원해주는 가게가 나타났다. 필름이 없어도 사진이나 그림을 복원해 줄 뿐만 아니라 확대ㆍ축소해 주고, 비디오테이프를 CD로 다시 변환해 준다는 광고가 적혀 있다.

간고등어와 굴비를 파는 가게, 양말과 피규어를 파는 가게, 풍수지리로 침대 위치를 잡아주는 가게, 전자 담배 가게, 인쇄물 글씨 커팅 가게, 소형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 명함 디자인과 인쇄 가게, 웰빙 슈퍼 푸드를 파는 가게, 귀농 · 귀촌을 도와주는 가게를 지났다. 고속버스 지하상가는 옷가게가 많았는데 을지로지하상가는 업종이 다양했다. 

 

▲ 을지로 지하상가 정글존 [정병혁 기자]


갑자기 그린색 조명 길이 나타났다. 양쪽 벽은 코끼리와 기린과 원숭이가 놀고 있는 그림이다. “정글 테마존입니다. 정글을 느끼면 걸어보세요” 라는 문구가 보인다. 느닷없는 ‘정글 테마존’이 약간 생뚱맞긴 하지만 지하도로에 테마존을 만든 아이디어는 신선했다. 안내문에 따르면 테마는 정기적으로 교체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걷게 되면 다른 테마와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네일 가게, 옛날 찹쌀떡 가게, 개량 한복 가게를 지나 을지로4가역에 이르렀다. 계속 직진하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다. 광장시장으로 가려면 지상으로 나가야 했다.

밖은 추웠다. 청계천 배오개다리를 지나며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생각했다. 봄이 되면 청계천을 걸으며 박태원 소설 속 청계천과 지금의 청계천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청계천에 모여 빨래를 하던 1930년대와 지금의 청계천이라. 재미있는 시도가 아닐까.

 

▲ 광장시장 [정병혁 기자]


미싱 가게가 밀집된 길을 지나 광장시장으로 접어들었다. 시장은 붐볐다.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마약 김밥, 잔치국수, 떡볶이를 주문했다. 비좁은 자리도 불편했지만 김밥은 차가웠고, 잔치국수마저 미지근했다. 옆에 앉은 외국인은 떡볶이를 한 입 먹고는 탄성을 질렀다. 자리를 옮겨 빈대떡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빈대떡과 육회를 시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상설시장인 광장시장은 다음 기회에 따로 천천히 탐구해 보기로 한다.

 

강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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