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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난입 잔혹사…박정희 정권 때는 총 들고 판사 협박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기사승인 : 2025-01-24 14:26:09
[김덕련의 역사산책 14]
尹 지지자들 법원 난입…유사 전례 존재
1958년 진보당 사건 1심 후 괴한들 난입
1964년 무장 군인들, 판사 집까지 몰려가
솜방망이 처벌, 사법 독립 기반 침식 초래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일부 극렬 세력이 지난 19일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 법관 결정에 불만을 품고 떼를 지어 법원에 난입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한국 현대사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현대사에서 법원 난입으로 언급되는 대표적인 사건은 두 가지다. 

 

▲ 지난 20일 서울서부지법에서 공사 관계자들이 난입 사태로 파손된 외벽 등의 보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뉴시스]

 

첫 번째 사건은 이승만 정권 때인 1958년 7월 5일 발생했다. 그날 오전 11시 35분경 대한반공청년회라는 단체에 속한 괴한 200여 명이 서울 서소문 법원 청사에 난입했다. 1989년과 1995년에 서초동으로 옮기기 전 주요 법원은 서소문 쪽에 있었다.

이들은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단하라", "친공(산주의)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죽여라" 등의 살벌한 구호를 외쳤다. 법원은 거의 마비 상태가 됐고 유 판사 등은 몸을 피해야 했다. 낮 12시 45분경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자, 괴한들은 법원에서 물러나 인근 대한문 앞에서 해산했다.

사건의 계기는 사흘 전에 나온 진보당 사건 1심 판결이었다. 7월 2일 1심 재판장이던 유 판사는 조봉암의 간첩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내란을 기도했다'는 검찰 주장도 인정하지 않았다. 조봉암 이외의 진보당 간부들에게도 무죄 판결을 내렸다.

불법 무기 소지 등에 대해서만 조봉암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유 판사는 훗날 "정치적 사건임을 고려해 무리하게 징역 5년을 선고했는데도 봉변을 당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심 판결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인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제거하려 한 정권 상층부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여당인 자유당은 산하 단체를 움직여 '친공 판사'를 규탄하는 위원회 등을 결성하게 했다. 난입 진상을 밝히기는커녕 도리어 유 판사를 압박한 것이다.

정권에 밉보인 유 판사는 그해 말 법관 연임 심사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어야 했다. 조봉암은 2·3심에서 무리한 법리 적용으로 사형이 선고돼 1959년 억울하게 처형된다. 2011년 대법원은 전원 합의 판결로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무장 군인들의 법원 난입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1964년 5월 21일 자 1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두 번째 사건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64년 5월 21일 발생했다. 13명이 법원에 난입했는데, 대부분 육군 제1공수특전단 소속 현역 군인이었다(2명은 공수단 출신 예비역 장교). 1961년 5·16쿠데타, 1979년 12·12쿠데타에 이어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 때도 동원된 그 부대다.

이들은 최문영 대령 지시에 따라 카빈총과 권총으로 무장하고 새벽 4시 30분경 서울형사지법 숙직실에 난입했다. 전날 서울대에서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와 관련해 법관 결정에 불만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경찰은 박정희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한 이 행사 참가자 중 상당수를 연행했다. 숙직인 영장 담당 양헌 판사는 그들 중 일부의 구속 영장을 기각했다. 그러자 뜬금없이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법원에 난입한 것이다.

하지만 양 판사는 퇴청한 상태였다. 이들은 양 판사 집으로 몰려가 "양헌이 나오너라" 등의 고함을 질렀다. 양 판사를 만나자 "왜 영장을 기각했느냐"며 겁박했다. 이들이 오전 7시 30분경 물러갈 때까지 인근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사법부와 야당은 분노했다. 여당인 공화당은 처벌을 말하면서도 "양심적 군인들의 충정"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난입한 무리를 감쌌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부 정치인, 언론, 학생들이 반성해야 다시 그런 일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며 엉뚱한 곳으로 책임을 돌렸다.

그 와중에 최 대령 등 제1공수특전단 장교 8명이 6월 6일 새벽에 또 난입 사건을 일으켰다. 이번엔 동아일보사 편집국에 몰려가 '기사가 마음에 안 든다'며 행패를 부렸다.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7월 10일 군사 법원은 재판에서 법원 및 동아일보사 난입 사건 관련자 중 5명에게만 유죄를 선고했다. 5명 중 집행 유예자 1명을 제외한 4명이 징역살이 대상이었으나, 바로 그달 3명을 형 집행 면제로 풀어줬다. 남은 1명은 형량을 절반 가까이 줄여줬다.

1958년과 마찬가지로 1964년에도 법원 난입은 제대로 단죄되지 않았다. 이는 사법부 독립 기반 침식을 초래했다. 결국 1971년 사법부 파동을 분수령으로 법원은 사실상 정권에 예속됐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1987년 6월항쟁 후 사법부 독립을 되찾기 전까지 계속 그런 상태였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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