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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문학공간] "아픈 세상 이마 짚어주다 너 밤새 울었구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Google구글에서 선호하는 출처로 추가
기사승인 : 2026-08-07 10:51:46
9번째 시집 '내가 고요해질 때' 펴낸 박남준 시인
바오밥나무 껴안으려다 다쳐 갇힌 병상 시편들과
늙어가는 삶 돌아보며 고요해지는 상태 갈망 담아
"이제 나는 빈 잔 가득 고요한 잔향을 아는 나이"

박남준 시인이 9번째 시집 '내가 고요해질 때'(기역)을 펴냈다. 지난 5년 동안 써 온 53편에 시인이 직접 그린 그림을 곁들인 '그림 시집'이다. 그림은 시와 별개로 간혹 그려왔지만 시집에 활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릎을 다쳐 수술과 재활치료를 거치는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나온 병실 시편들을 비롯해 치료를 위해 전주와 악양을 오가며 겪었던 일상과 주변의 미물, 지나온 세월에 각인된 애틋한 사람들과의 인연도 담았다.  

 

▲ 바오밥나무 화분을 들다 다친 여파로 2년 여에 걸친 수술과 재활의 고통을 겪었던 박남준 시인. 병상 시편과 함께 늙어가는 삶의 잔향을 새 시집에 담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지난 시집이 바오밥나무를 찾아 마다가스카르까지 다녀오면서 펴낸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였다면, 이번 시집은 그곳에서 가져온 바오밥나무의 씨앗을 틔워 길러낸 어린 나무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잉태됐다. 주인공이 폭풍우 속에 실종되는 '어린 왕자' 작가 생텍쥐페리 소설 '야간비행'의 이름을 딴 술집을 나오다 그 또한 큰 곤경을 치렀으니, 이 '은발의 어린 왕자'가 겪은 우화 같은 사연을 어찌 받아들일까.

마다가스카르에서 씨앗을 얻어 키운 바오밥나무가 어른 키만큼 자랐을 때 무거운 화분을 옮기다가 나무가 쓰러졌고, 그는 자신의 발보다 바오밥의 안위를 먼저 걱정해 꺾이는 가지를 껴안으려다 왼쪽 엄지발가락이 화분에 짓이겨졌다. 빠진 엄지발톱 때문에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던 상태에서 '야간비행'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져 이번에는 무릎이 부서진 것이다.

모악산에서 살다가 지리산 자락 악양으로 건너가 새와 풀과 꽃들 사이에서 살아온 그가 2년 여에 걸친 수술과 재수술, 재활치료를 이어가는 동안 그곳을 떠나 전주에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두고 온 것들의 안부가 궁금해 간간이 악양을 다녀오긴 했지만, 자연의 품에서 살아온 그가 육신의 아픔과 함께 도심의 병실에 갇혀서 겪었던 고통은 짐작하고도 남음직 하다.

홀로 잠든 머리맡이 서러울까 봐 / 아픈 세상의 이마를 짚어주다가 / 너 밤새 울었구나 / 풀잎 나뭇잎 거미줄에 띄운 / 참 맑은 별빛 편지_'별빛 편지'

-병실에서 받은 '편지'인가.
"밤새 고통에 휩싸여 울었는데 눈이 왔다.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부탁해서 밖으로 나가, 뭉친 눈을 손으로 만지기도 했다. 그 눈이 밤새 나에게 온 별빛 편지같았다. 이번 시집에는 병실에서 쓴 시들이 많다." 

 

-고통 속에서 길어낸 이번 시집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나.
"시에 대한 순정적인 열정, 그런 게 사라진 것 같다. 뮤즈가 떠난 것 같다.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나이에 맞게 받아들인다는 건 내가 고요해지는 상태일 것이다. 병실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다 내맡겨야 되니 수치와 모멸감이 들면서 자존감이 자꾸 꺾였다. 존엄사도 생각해봤다. 성질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자제하고 마음 상태를 고요하게 하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휴대전화에 스케치를 하다가 손바닥만한 스케치북을 구해 그렸고, 그 그림들을 넣은 시집을 구상하게 됐다."
 

▲ 박남준 시인이 병실 창밖에 진설한 과일부스러기를 찾아 새들이 문병을 왔을 때 그린 시화(오른쪽)와 새 시집 표지. [기역] 

 

-떠나가는 '뮤즈'를 그림으로 붙든 셈인가.
"마음을 다스리는 차원이었다. 이전에는 그냥 부채에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이제 시를 놓고 그리려고 하니, 구체적이기보다는 시의 맥락을 하나 잡아야 되기 때문에 생각이 좀 많아졌다. 그 과정에서 고요해졌다."

빈 찻잔의 향기 깊이 맞이하네 // 사랑이 머문 자리 / 그 사랑의 소중한 / 자취를 / 몸에 들여 각인시키는 것이리 // 사랑을 했네 / 이별이 없을 리야 / 때로 사랑은 견딜 수 없는 울음이 되어 / 밤하늘을 부유했으나 / 그 슬픈 사랑으로 인해 / 강의 저편에 이를 수 있었네 // 이제 나는 빈 잔 가득 고요한 / 잔향을 아는 나이 / 그 향에 취하나 거기 매이지 않는_'잔향'

-'잔향'을 아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
"뜨거운 물로 다관을 한 번 헹구고 차를 넣으면 차통에서 나오는 차향과 뜨거운 김이 올라오면서 다관에서 나오는 차향이 다르고, 다관에 우려서 찻잔에 따랐을 때 나오는 향이 또 다르다. 차를 다 마셨을 때, 찻잔이 비워져 있을 때, 빈 찻잔의 향은 마실 때보다 더 깊이가 있다. 불가에서 '비워야 채울 수 있다'고 하듯, 일렁이는 것들이 이제 고요해지는 그런 상태가 잔향이 아닐까. 종심소욕(從心所欲)의 경지 같은…"

이번 시집에는 회한과 참회의 정조를 띤 시편들이 많은 편이다. 급성폐렴 격리병실 유리창에 비치는 '몰골'을 보며 "너 누군가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 참으로 어루만졌느냐고" 물으면서 "한 그리움이 오면 한 그리움이 떠난다"고 버스정류장에서 중얼거리기도 한다. 병실 생활을 하면서도 악양에 두고 온 미물들이 그립고 안타까웠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집에 좀 가서 물도 주고 그래 달라"라고 부탁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런 거 챙기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하릴없이 창가로 침대를 옮겨 창밖으로 과일 부스러기를 가져다 놓았더니, 새들이 차례로 문병을 와서 시를 선물했다.

깨진 마음 밑바닥 들여다보는 것도 / 다 공부라지만 안 되겠다 / 하소연하고 싶었다 / 동박새도 올까 / 창밖 동백나무를 청해 그 아래 / 과일 부스러기 밥상을 차렸다 / 새가 왔다 새들의 문안인가 / 못난 마음 꾸짖으려 찾아오는 / 동박새가 딱새가 검은이마직박구리의 행렬이 / 머리 숙이게 하는 아침 / 날 일깨우는 스승들께 / 온전한 사과로 대접해야겠다 _ '조문 받고 사과 대접'

1부 병실 시편에 이어 2부는 '사랑'으로 문을 연다. '생의 송두리째를 걸었다 / 삶의 전부가 오직 그리운 쪽을 향해 / 달려갔기 때문'이라고 돌아본다. 그는 '잔향'에서도 "사랑은 견딜 수 없는 울음이 되어 / 밤하늘을 부유했으나 / 그 슬픈 사랑으로 인해 / 강의 저편에 이를 수 있었네"라고 언급했거니와, 지나간 사랑은 어찌 시인을 새삼 어지럽히는가. 그는 "내 생을 송두리째 바칠 사람이 있었는지 돌아보니, 있었더라"면서 "새들이 날아가는 뒤편에 온통 붉은 색채로 서 있는 나무를 그려 넣었다"고 말했다.

발칙 유쾌 패기 넘치는 상상력, 갓 건져 올린 물고기의 비늘에 파닥거리는 윤슬, 이윽고 고요한 시위를 당기는 파르릉 무섭도록 팽팽한 긴장, 단 한 번이라도 내 시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는 했을까 수면을 차고 튀어 오른 물방울에 비친 내 가여운 시, 곧고 높던 매화 향기는 어디로 갔을까 _ '매화와 내 가여운 시'

 

▲ 박남준은 "아직 사랑이 남아 그림시집을 낸다"면서 "그리움 없이 어찌 세상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라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발칙 유쾌 패기 넘치는 상상력'이 아직 다 사라진 건 아니다. 그는 '대상' 통보를 받았는데 '은근슬쩍 눈길이 갔던 모모 문학상'이 아니라, 자궁경부암 대상 통보였다. 평생 남자로 살아온 박남준은 "나는 본시 사내아이로서……"라는 '패왕별희' 한 대목을 떠올리며 황당해 한다. "내 영혼의 충격과 상상 고통과 / 온갖 등등을 받은 / 이 낯 뜨겁고 기막힌 질환 상태를 / 어떻게 보상해줄 거냐"('대상을 통보받다')고 항의한다. 황당한 행정 착오는 육자배기 사설처럼 늘어지고, 당혹감은 웃음으로 전환된다.

'고독사 위험자 설문 전화'는 쓸쓸하다. 그는 "지난 육 개월 동안 죽음에 대한 생각은 해보았느냐"는 마지막 설문에 "겨울 지리산 / 계절과 장소를 정해두기도 했었다고 / 끝내 실패했으나 / 무척이나 오래오래 첫사랑처럼 잊지 않았다고 했다"면서 "고맙게도 고독해지는" 전화였다고 썼다. 3부는 이미 죽은 이들을 포함해 그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로 채웠다. 문인수, 이문구, 김이수, 송기원, 박민평, 이병운, 김장하, 프란치스코 등을 기리는 시편들이 다수다.

박남준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닮고 싶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면서 "나도 이렇게 품이 너른, 누군가를 따뜻하게 껴안아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늙어가는 시인을 너그럽게 봐주시라"면서 "아직 사랑이 남아 그림시집을 낸다"고 덧붙였다. 그가 여전히 놓지 못하는, 지독하고 이상한 사랑.

물들지 못하는 삶이라니 / 푸른 붉가시나무 잎의 / 지독하고도 이상한 사랑을 기웃거린다 / 몸이 먼저 붉은 몸속을 가진 / 붉가시나무 숲에 내리는 눈발을 더듬는다 / 나도 다시 뜨거워지고 싶기 때문이다_ '붉가시나무를 기웃거렸다'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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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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