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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사형 위기를 넘겼나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기사승인 : 2025-11-27 14:06:21
[김덕련의 역사산책 39] '경무대 앞 발포 사건' 재판
'피의 화요일' 4·19 발포 명령 책임자 규명 문제
1960~1961년 서울지법·혁명재판소에서 3번 판결
반전 연속…홍진기, 징역 9개월→사형→무기징역
'곽영주만 사형'으로 귀결…'공정성 의문' 지적도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경무대, 즉 지금의 청와대 쪽으로 밀려들었다.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무차별 발포했다. 오후 2시 30분경 이승만 정권은 서울시 일원에 경비계엄을 선포했다.

이때 계엄을 오후 1시로 소급 적용했다. 발포 이전에 계엄이 선포된 것처럼 꾸민 것이다. 오후 2시 50분 경비계엄을 비상계엄으로 격상했다. 계엄 선포에 고무된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이어갔다. 이날 서울, 부산, 광주에서 123명이 목숨을 잃었다. 말 그대로 '피의 화요일'이었다. 

 

▲ 4월혁명 63주년인 2023년 4월 19일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은 유가족이 묘비를 어루만지며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뉴시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4월혁명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자행된 발포를 누가 명령했는지 규명하는 문제가 많은 시민의 관심을 모았다. 그런 사건 중 하나인 4·19 경무대 앞 및 서울 일원 발포 명령 사건(이하 '경무대 앞 발포 사건') 관련자로 그해 5월에 6명이 구속됐다.

사건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홍진기, 이승만 대통령 경호 책임자였던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 내무부 치안국장이었던 조인구, 서울시 경찰국장이었던 유충렬, 서울시경 경비과장이었던 백남규, 서울시경 수사지도과장이었던 이상국이 그들이다. 이 시기에 경찰은 내무부 산하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외할아버지인 홍진기는 1958년 2월부터 법무부 장관으로 활동하다가 1960년 3월 내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4·19 그날 이 대통령에게 계엄 선포를 건의하고 '오후 1시로 소급 적용'을 주장했다. 곽영주는 대통령의 신임을 근거로 권세를 부린 인물이다. 유정현 전 한나라당 의원의 할아버지인 유충렬은 일제 강점기에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 6월 검찰은 홍진기·조인구를 살인 교사 혐의로, 곽영주·유충렬·백남규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이상국의 경우 발포 명령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보고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이 7월에 시작됐다. 피고인들은 책임을 서로 떠넘기며 '네 탓 공방'을 벌였다.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은 이듬해 말까지 3번 내려지는데 반전의 연속이었다.

검찰은 8월에 홍진기·곽영주·유충렬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발포 명령 총 책임자는 홍진기, 경무대 앞 발포 명령자는 곽영주, 서울시 일원 발포 명령자는 유충렬이라는 판단이었다.

백남규에게는 무기징역, 조인구에게는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조인구에 대한 구형량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이유 중 하나로 '검찰에 공로가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조인구는 검사 출신이었다.

10월 8일 서울지법 형사제1부는 이 사건을 비롯한 이승만 정권 관련 6대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홍진기에게 징역 9개월, 곽영주에게 징역 3년이 선고됐다. 발포 명령 관련 혐의는 무죄, 3·15 부정 선거 관련 부분 등만 유죄로 판단한 결과였다. 조인구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이들의 형량을 대폭 줄여준 것과 달리 재판부는 유충렬과 백남규에게는 구형대로 각각 사형,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홍진기 등은 관대하게 처분하고 일선 경찰 지휘관들에게만 발포 명령 책임을 물은 판결이었다. 이날 재판부는 6대 사건의 나머지 사건 피고인 다수에게도 가벼운 형 내지 무죄를 선고했다.

10·8 판결은 여론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입법에 부정적이던 장면 정부가 태도를 바꿔 반민주 행위자 등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경무대 앞 발포 사건'에 대한 두 번째 판결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내려진다. 쿠데타 후 구성된 혁명검찰부는 그해 9월 25일 홍진기·곽영주에게 사형, 유충렬에게 징역 12년, 백남규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구형했다. 조인구는 10·8 판결 후 잠적해 이날 구형 대상이 아니었다.

그달 30일 혁명재판소 제1심판부는 홍진기·곽영주에게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유충렬과 백남규에게는 구형보다 형량을 높여 각각 무기징역, 징역 10년 판결을 내렸다. 동아일보는 "10·8 판결에서 홍·곽의 (발포 명령 부분) 무죄 선고로 그렇게 시끄러웠고 마침내 특별법까지 만들게 했던 발포 명령 사건도 이로써 일단락되었다"고 논평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재심이 진행됐다. 12월 19일 혁명재판소 상소심 심판부는 홍진기에게 무기징역, 유충렬에게 징역 20년, 백남규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형량이 줄어든 이들과 달리 곽영주는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틀 후 곽영주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2년 후인 1963년 12월 홍진기·백남규는 특사로 석방됐고 유충렬은 감형됐다. 그 후 홍진기는 언론사 사주로 살아간다. 유충렬은 출옥 후 중고교를 설립하고 교육계 인사로 변신한다. 조인구는 잠적 5년 만인 1965년 자수해 1968년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곽영주의 부인은 생전에 "우리 남편은 공고 나와서 죽고 홍진기 씨는 서울법대 나와서 살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홍진기가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한 법조 엘리트라는 점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판결이 바뀌는 데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얘기다.

재판 결과에 대한 의문은 학계에서도 제기된다. 한 연구자는 발포 명령을 한 개인이 독단적으로 내렸다고 보기 어렵다며 "명령자로 곽영주만 처형한 것은 공정한 판결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문점은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사건 전모를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 사태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 결과가 내년 초부터 나온다. '경무대 앞 발포 사건' 재판과 달리 공정성 논란을 빚지 않을 결과를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주요 참조=남기현 논문(「'경무대 앞 발포사건' 책임자 처벌에 관한 고찰」, 『인문과학연구』 22, 2016), 『민주화운동사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편찬 중) 4월혁명 부분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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