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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 다수는 정말 형수와 결혼했을까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기사승인 : 2025-12-10 15:36:56
[김덕련의 역사산책 40] 고구려의 혼인 풍속
형사취수 사례로 주목받은 우씨 왕후·산상왕 혼인
부여·고구려서만 확인된 습속…존속 시기 등 논란
'지배층=형사취수, 피지배층=서옥혼 가능성' 주장도
'혼인 때 재물 보내는 예는 없다' 7세기 기록 눈길

지난해 방영된 TVING 드라마 '우씨 왕후'는 실화를 소재로 했다.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의 왕비였던 우씨 왕후는 197년 고국천왕이 사망하자 그 둘째 동생 연우, 즉 산상왕과 혼인했다. 고국천왕 왕비로 17년, 산상왕 왕비로 30년을 살았고 산상왕 사후에는 왕태후로 군림했다.

형이 죽으면 남동생이 형수를 부인으로 맞는 혼인 풍속을 형사취수(兄死娶嫂)라고 한다. 이 드라마를 다룬 다수의 기사는 형사취수를 언급했지만 이 풍속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간과한 경우가 적지 않다. 고구려인 다수는 정말 형수와 결혼했을까 하는 문제다. 

 

▲ 드라마 '우씨 왕후'의 한 장면. [TVING 화면 갈무리]

 

형사취수는 형제의 사후 그 처를 다른 형제가 아내로 삼는 취수혼의 대표적인 형태다. 취수혼은 세계 각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는데 한국사에서는 두 나라에서 형사취수만 확인된다. 하나는 부여, 다른 하나는 부여와 풍속이 유사했던 고구려다.

중국의 여러 사서에는 부여와 고구려에 형사취수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형사취수가 두 나라에서 언제 생겨나 어느 시기까지 존속했는지, 사회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아니면 특정 계층만의 풍속이었는지 등을 명시한 기록은 없다.

많은 연구자가 한국사에서 형사취수의 실상에 대해 갑론을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우씨 왕후 이야기가 크게 주목받은 지점이기도 하다. 한국사 전체에서 유일하게 기록으로 확인되는 형사취수 실제 사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씨 왕후 당대에 형사취수가 고구려에서 예외적인 혼인 형태였을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기록한 산상왕 즉위 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고국천왕이 죽자 우씨 왕후는 밤에 왕의 첫째 동생 발기를 찾아가 다음 왕위를 제안했다. 다만 왕의 죽음은 알리지 않았다. 발기는 부인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타박했다. 왕후는 발기 동생 연우의 집으로 가서 왕의 죽음을 알렸다. 연우는 왕후를 환대했다.

다음 날 왕후는 고국천왕의 명이라 속이고 연우를 왕으로 세웠다. 발기는 "(연우) 네가 차례를 뛰어넘어 왕위를 빼앗는 것은 큰 죄"라며 병력을 동원해 산상왕과 왕후 세력을 공격했다. 그러나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패배했다.

대략 이런 내용인데, 형사취수가 예외적인 혼인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보는 쪽에서는 우씨 왕후와 산상왕의 결합을 지배층 다수가 문제 삼지 않은 듯하다는 데 주목한다. 형사취수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면 지배층 다수가 발기에게 동조했겠지만, 그런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형사취수가 예외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의 근거 중 하나는 발기가 밤에 찾아온 우씨 왕후에게 취한 태도다. 예가 아니라고 왕후를 타박한 밑바탕에 형사취수가 일반적인 혼인 형태가 아니라는 판단이 자리했던 것 아니냐는 얘기다.

또 우씨 왕후가 훗날 사망 직전 유언에서 자신이 도의에 어그러진 행동을 해 고국천왕을 뵐 면목이 없다고 한 부분에 주목한다. 형사취수를 비도덕적 행위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한 것 아니겠느냐는 주장이다.

존속 시기와 관련해서는 형사취수가 우씨 왕후 사례 이후 점차 사라져 갔을 것이라는 견해에 무게가 실린다. 왕위 계승 원리 변화 등 사회 변동을 고려할 때 형사취수는 고구려 초기에 국한된 풍속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형사취수를 행한 계층에 대해서도 연구자들의 견해는 엇갈린다. 사회 전반적으로 널리 행했을 것이라는 해석과 왕실을 비롯한 특정 지배 집단에서 주로 행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병존한다. 후자는 고구려인 다수가 실제로 형수와 결혼했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만약 형사취수가 주로 지배층의 혼인 풍속이었다면 피지배층은 어떤 방식으로 혼인했을까.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이 서옥혼(壻屋婚)이다. 3세기에 편찬된 중국 사서에 따르면 서옥혼 방식은 다음과 같다.

혼인하기로 정한 다음 여자 집에서 몸채 뒤에 작은 별채인 서옥, 즉 사위가 머물 집을 짓는다. 해가 질 무렵 신랑이 찾아와 신부와 함께 잘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신부 부모는 서옥에서 자도록 허락한다. 그 후 신부가 낳은 아들이 장성하면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한 연구자는 고구려인의 대다수였을 피지배층은 서옥혼을, 지배층은 형사취수를 주된 혼인 풍속으로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처가에 머물러야 하는 서옥혼은 지배층에게 효용성이 떨어지고 실행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고구려는 국토가 넓고 여러 종족이 살았으며 700년 넘게 존속한 나라였다. 혼인 풍속이 다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면에서 우씨 왕후 사례 이후 400여 년이 지난 7세기에 편찬된 중국 사서들이 전하는 고구려의 또 다른 혼인 풍속은 매우 흥미롭다. 이 사서들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바로 혼인이 이뤄진다.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을 보내는 예는 없다. 혹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노비로 팔았다'고 여겨 사람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고구려 지배층도 이러한 풍속을 따랐을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이 무렵 피지배층은 혼인과 관련해 재물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엄청난 결혼 비용에 허리가 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혼인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선조들의 삶의 모습이다.

△주요 참조=김지희 논문(「고구려 혼인 습속의 계층성(階層性)과 그 배경」, 『동북아역사논총』 60, 2018), 김지영 논문(「고구려의 혼속 - 한씨 미녀 설화를 중심으로」, 『역사와현실』 106, 2017), 김수태 논문(「2세기말 3세기대 고구려의 왕실 혼인 - 취수혼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38, 2005)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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