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음각해낸 자본의 폭압 속 영원한 사랑의 벽화
죽음 문턱 넘나든 '직업병' 수술 끝에 이루어낸 결실
"장편으로는 마지막, 단편과 산문 쓰며 여유 누릴 터"
소설가 조정래가 작가 인생 56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자, 마지막 장편을 표방한 '서리꽃'(전2권, 해냄)을 펴냈다. 자본의 탐욕 속에서도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실천하는 남녀의 애틋한 사연이 예술가 소설의 양상을 띠며 전개된다. 냉대와 가난 속에서 혼신의 힘을 그림에 쏟다가 130여 년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반 고흐의 영혼이 작가의 예술혼과 겹쳐지는 듯하다.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영원한 사랑'을 그려내면서 교양소설의 미덕까지 완비한 노장의 투혼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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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6년 작가 인생 처음으로 사랑과 정면으로 마주한 소설가 조정래. 그는 "내가 소설 쓰기에 평생 목숨을 걸었던 것은 그 일이 가장 하고 싶고, 가장 즐겁고, 가장 의미 있고, 가장 보람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고교시절 시화전에서 시와 그림으로 만났던 이재이와 윤소인, 이들은 세월이 흘러 재회한다. 이재이가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몰래 철학으로 전공을 바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늘 그리던 윤소인을 만나지만 그녀가 겪고 있는 불행에 마음이 어둡다. 윤소인의 아버지가 대기업의 농간으로 기술 특허를 갈취당한 뒤 빚에 허덕이면서 가계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그녀가 가장 역할까지 떠맡은 처지였기 때문이다. 재벌가의 아들 이재이가 자신의 상속 지분을 헐어가며 그녀를 돕고, 둘의 사랑이 지상에서 결실을 거두는가 싶었는데 윤소인은 지하 생활자의 후유증으로 폐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소설은 반 고흐의 작품을 따라가는 여정 끝에 영원을 향한 절정으로 비상한다.
소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작가 자신도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했다. 작가 생활 56년 동안 집필에만 전념해온 탓에 '직업병'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신경성 위궤양, 오른팔 마비, 두 차례에 걸친 탈장 수술을 거친 끝에 급기야 복부대동맥 인공혈관 치환 수술을 받았다. 그는 당시 눈앞을 덮은 회색 장막을 '지옥문'이라고 표현했다. 수술 뒤 기력이 크게 떨어져 소설 후반부에는 사흘거리로 몸살을 앓았지만 결국 원고를 완성했다. 수도하듯 글을 써 온 그의 '서리꽃' 출간이 늦춰진 배경이다.
출간을 계기로 기자들과 만난 조정래는 모두발언에서 "슬픈,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면서 "그것은 사회적 문제와 깊이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본의 무한 탐욕이 국가 권력과 야합하고 타협하면서 엄청난 폐해를 야기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라며 "그 속에서 영원한 사랑이 어떻게 파괴되고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재창조해낼 수 있는지 탐색했다"고 덧붙였다.

-현실에서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까.
"사랑은 즉물적, 현실적으로 말하면 두 상대가 살아 있을 때까지 가능하겠지만 형이상학적으로 말을 한다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이 발동되는 범위를 최대한 확대해서, 죽음도 사랑을 위하여 하찮게 버림으로써 남녀가 두 마리 학으로 환생해서 저 먼 달을 향해서 날아가도록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쓰게 된 것이다. 인간은 육체적 동물인 동시에 정신적 동물이다. 그 정신적 동물은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얼마든지 형상화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탄생한 전설, 그것은 바로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이다. 이번에 그 상상의 세계를 작가로서의 권한을 최대한 발휘해 한번 써보았다. 제 소설에서 처음이고 마지막일 것이다."
-자본의 폭압 속에서 사랑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사랑은 우리 인간이 삶을 존속해나가기 위한 희망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면 어떤 힘으로 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희망은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가장 큰 힘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어갔는데 히틀러가 몰락하고 그리고 아우슈비츠가 해방됐을 때 희망을 버리지 않은 소수만 살아남았다. 막연히 먼 희망을 가진 사람은 살아남고, 성탄절·다음 해처럼 단기 희망을 걸었던 사람은 그 기대가 무산될 때마다 사망했다는 심리학 연구가 있다.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이성의 사랑이든, 부부의 사랑이든, 가족의 사랑이든 간에 모두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희망과 같은 또 하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인간이 세 끼 밥을 먹고 사는 한 어떤 방법으로든 사랑을 창조하게 되어 있다. 사랑의 짝을 찾게 되어 있고, 찾아지고, 그리고 사랑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험악해도 이 소설에서처럼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확신, 그것이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주제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소설은 무엇인가.
"AI가 기본적인 노동을 대신하면서 노동자들이 직업을 잃어버리게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앞으로 4~5년 사이에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단순 노동자들이 직업을 잃어버리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 수 있고, 이미 시작됐다. 변호사가 며칠 걸려 읽어야 하는 서류를 AI는 단시간에 읽어버린다. 다행히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로 어디까지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AI가 소설 쓰는 일에서는 인간을 따라올 수 없다. 상상력은 작가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AI가 아무리 영리해도 우리 인간 두뇌의 움직임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된다. 그런 희망으로 AI를 하인으로 부리는 그런 시대를 살면 될 것이다. 소설뿐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의 최첨단은 AI가 점령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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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마귀가 나는 밀밭'(왼쪽)과 이 그림을 표지로 삼은 조정래 첫 창작집 '황토' (현대문학사, 1974).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포기하고 소설을 썼다는 조정래가 고교시절부터 좋아했던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이번 소설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그림이다. [위키피디아, 국립중앙도서관] |
'서리꽃'에는 작가 조정래의 본디 꿈이었던 화가의 길이 투사돼 있다. 반 고흐를 좋아했던 그의 정념을 미대 출신 윤소인이 대신한다. 시한부 삶을 사는 소인이 이재이와 함께 반 고흐 작품을 찾아 파리에서 네덜란드까지 탐사하는 여정에서 고흐의 그림에 대한 작가 나름의 정리된 생각들이 전개된다. 자본의 폭압에 스러진 윤소인의 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거론되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다. 윤소인은 이 작품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듯 중얼거린다. '저 밀밭 위를 나는 까마귀 떼에 실려 반 고흐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갔듯 저도 저 까마귀 떼에 실려 아빠 곁으로 갈 거예요. 그치만 아빠, 살고 싶어요…….'
-존재의 심연과 영혼을 탐색하는 소설도 예고한 바 있는데, 장편으로는 마지막이라니 당혹스럽다.
"지금 현재로는 사고력에 아무 문제 없고, 쓰는 속도도 40대와 비슷하지만 소설 앞에서 겸손해지고 싶고 몸에 대한 자유를 조금은 허락하고 싶다. 지금까지는 100m 달리는 식으로 마치 투쟁하듯이 그렇게 문학과 대적을 해왔기 때문에 56년 세월을 살면서 68권의 책을 썼다. 너무 많이 썼다. 앞으로는 제 인생도 좀 쉬엄쉬엄 살고 싶고, 아내와 함께 가까운 나라 여행도 많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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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생 원고지에 새기듯 집필해온 조정래. 그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눌러 써보면 문장 하나하나가 제 영혼을 거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앞 문장이 뒤를 끌고, 뒷문장이 앞 문장을 끄는 그런 탄력과 긴장이 유지된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이번 소설에는 내년 결혼 60주년 '회혼'(回婚)을 맞는 아내 김초혜 시인의 시들이 인용된 대목도 눈에 띈다. 죽는 건 육신일 뿐이고 영혼은 생생히 살아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내생'이라는 제목을 단 짧은 시편 '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있다'와 조정래가 김 시인의 최고 작품으로 꼽는 '어머니'가 이재이를 통해 소개된다. 김 시인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권리를 내세우며 관철시켰다고 밝힌 조정래는 이번 소설에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개입됐는지 묻는 질문에 "소설은 완전히 픽션"이라면서 "여자는 스물다섯 살에 결혼한 김초혜, 그 이외에는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조정래는 "그동안 소홀히 한 단편의 세계를 다시 살려내고, 오래 산 죄로 인생에 대한 명상을 좀 하면서 수상록도 쓰고 싶다"면서 "붓글씨도 시작해서 등단 60년째 되는 '회문식'(回文式) 때 제 붓글씨 선물을 610명에게 드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조정래가 새롭게 그려낸 이 시대 사랑의 전설은 달을 향해 날아가는 두 마리 학으로 완성된다. 다음 생은 '남은 / 사람들의 / 가슴에' 있다.
두 마리 학은 정상의 하늘에서 만났다. 서로 날개 부딪치고, 긴 목 서로 감으며 한참이나 휘돌며 솟구치고, 감돌며 내려앉고 하다가 각각 떨어졌다. …달 속으로 계속 날아가고 있는 두 마리 학은 아득하게 멀어지며 자꾸만 작아지고 있었다. 점으로 변하고, 그 점마저 까마득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_ '서리꽃'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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