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후 밑바닥 앵벌이 아이들과 당시 유행가로
탐욕과 기만과 착취, 저항의 고리를 영상 언어로 그려
"재벌들 생중계하는 '선망'의 시대에 절실한 '공감'"
소설가 천명관이 새 장편 '아코디언'(창비)을 펴냈다. 한국전쟁 직후 거리의 앵벌이 아이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행태를 그려낸다. 시대의 풍경과 정서는 당시 유행한 다양한 노래들을 활용해 드러낸다. 인간들의 변치 않는 탐욕과 지배 욕구, 저항의 몸짓들이 이 서사를 관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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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를 시작한 지 14년 만에 완성한 장편을 들고 돌아온 소설가 천명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앵벌이 대장 격인 목사라는 이가 어떻게 아이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만하고 착취하는지, 그 교묘하고 기만적인 논리가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난다. 당한다고 해서 선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간의 복잡성은 아이들의 위악과 야만성에서도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영상처럼 펼쳐지는 공들인 문장으로 흘러간다.
공간적 배경은 전쟁의 여파가 짙게 남아있는 해방촌 언덕배기의 무허가 판자촌과 서울 도심이다. 주인공 '동이'를 비롯해 '깜상', '거북이', '찬이', 눈먼 소녀 '연이' 등 전쟁고아들은 자신들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는 '양 목사'와 야차 같은 사내 '아미'의 지배 아래 앵벌이로 착취당한다. 이들의 숙소 지붕 위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높이 세워져 있어 멀리서도 눈에 띄었지만, 그 십자가 아래의 삶은 참혹한 지옥 그 자체다.
양 목사는 기만적이고 교활한 악의 세력을 대변하는 강렬한 인물이다. 그는 거리에서 동냥해 온 굶주린 아이들에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오늘도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나이다"라며 기도를 강요하면서도, 정작 솥 안에서 끓고 있는 것은 늘 멀건 호밀죽뿐이다. 배고픔을 못 이겨 깡통 동전으로 팥죽을 몰래 사 먹은 깜상을 적발해 내는 과정은 소름이 끼칠 만큼 그로테스크하다. 아이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마약인 '구름탄(세코날)'을 먹여 정신까지 지배하는 악랄함을 보인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거북이의 입을 빌려 소설은 양 목사의 착취를 이렇게 고발한다. "중국에는 가마우지를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 있어. (...) 어부들이 가마우지 목을 끈으로 묶어놓았거든. 사냥한 물고기를 빼앗으려고. 그러니까 구름탄은 우리 목에 채워진 올가미 같은 거야." 종교적 구원의 외피를 쓴 포식자가 가장 연약한 아이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부조리를 묘사한 것이지만, 올가미를 채우려는 포식자들은 얼굴만 바뀔 뿐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문학동네소설상에 당선된 작품 '고래'(2004)가 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 새삼스럽게 천명관의 문체와 이야기 세계가 각광을 받았다. 영화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다시 10년 간 그 세계로 가서 입봉한 후 이번 작품을 내면서 소설로 귀환했다. 시나리오에 익숙한 그가 그려낸 소설이 그대로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가독성을 발휘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2012년 창비 블로그에 '길의 노래'로 연재를 시작한 지 14년 만의 결실이다.
-한국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이 지금 어떤 의미일까.
"한국전쟁이야말로 정말 인류사에 드문 아주 끔찍하고 아주 거대한 비극이면서 현재 한국 사회의 지형을 만든 가장 근원적인 출발점일 뿐 아니라, 여전히 그 자장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분단이 고착화되고 이데올로기 투쟁이 있고 그로 인해 진영이 갈라지고, 이 상황을 한껏 이용해 권력을 잡는 사람들이 여전하다. 저널리즘이 아닌 문학은 결국 개인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선택한 개인은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된 아이들이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두 가지 커다란 힘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타인을 지배하려는 속성이다. 그 힘은 사실 어마어마하게 강하고 집요하다. 이에 맞서서 그 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의지가 투쟁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4·19가 등장하는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는 '동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군부독재가 등장해서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영화 쪽 일에 복무했던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는가?
"특별히 그 전에 비해 변화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상이 AI의 등장으로 엄청나게 변할 거라 생각하는데, 속성은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선망의 시대'라는 생각이다. 제가 젊을 때는 '공감의 문학'이 있었다. 문학 작품도 그야말로 장삼이사들의 이야기, 그 당시 하위 계층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심이었고, 드라마만 해도 주로 그런 이야기들이 많았다. 골목길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이야기, 농촌의 이야기 같은 그런 것으로 공감하고 우리가 같은 사람이구나,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세상의 온기를 느끼면서 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선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최근에도 재벌들이 몰려다니니까 실시간 라이브로 중계까지 했다. 그 감각이 뭔지 모르겠다. 도대체 뭘 바라는 건지. 물론 선장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하지만 공감이 거의 사라져서 이제는 타인을 다 적대시하는 분위기로 가는 게 아닌가 싶다. 하위 주체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제는 어디에서도 다루는 데가 없다. 문학 작품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그들은 오히려 이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할 존재처럼 혐오가 아주 심해졌다. 결국 공감하고 서로 함께 이겨내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데, 이렇게 서로 증오만 키우고 혐오로 가면서 점점 더 고립돼 가는 상황이 안타깝다."
-'고래' 스타일의 판타지와는 다른 리얼리즘 문법을 구사했다.
"1980년대 리얼리즘 문학에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하위 주체들에 대한 연대와 공감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고 그런 삶을 담아내려고 많이 노력을 하면서 노동자 의식을 다뤘다. 그때 느낀 바로는 리얼리즘 문학이 도식적인 어떤 틀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형식들이 그렇게 오래 유효하지 않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독자들의 요구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고래'를 쓸 때 좀 더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소설도 지루하지 않게 쓰려고 애썼다. 원래 더 대중적인 영화 일을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장르적인 취향을 갖고 있어서 이 안에도 서스펜스 스릴러라든가 미스터리 같은 요소들도 많이 들어갔다. 그런 면에서 과거 리얼리즘과는 조금 차별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음악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 그 자체로 시대의 심장박동이다. '럭키 서울' '목포의 눈물' '슈샨 보이' '테네시 왈츠' '홍콩아가씨' '베사메무초'로 이어지는 장 제목들은, 실제 노래만큼이나 그 시절의 공기를 복원한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움막 안을 적시는 찬송가, 미군 클럽의 이국적인 리듬, 극장의 떠들썩한 박수 소리가 전쟁 직후의 서울을 무대로 바꾸어놓는다. 동대문 앵벌이파 두목 육손이 경동맥을 면도날에 찔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에피소드1'은 '홍이'가 '동이'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아코디언을 들고 '베사메무초'를 연주하기 위해 음악이라는 생명 쪽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때로는 너무 지쳐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어둠 속을 헤맬 때도 있었고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와 죽음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붙들어 세워 비트가 흐르는 곳으로 향하게 했다. 그렇게 음악은 죽음의 반대말이 되었고 어린 앵벌이는 오랜 세월 캄캄한 길을 더듬어 마침내 거대한 극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거였다._ '에피소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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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명관은 "그 시절에 유행했던 멜로디와 목소리, 노래에 담긴 풍경을 음미하며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음악은 죽음의 반대말'이라는 진술이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음악을 굉장히 좋아한다. 다양한 음악을 어릴 때부터 듣고 깊게 사랑했고,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면 반드시 음악을 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음악은 인생에서 정말 거의 공기와 같은 거였다. 음악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설레고 눈물 날 때가 많다. 음악의 비트는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심장의 박동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창작(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멋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 중 하나는 '놀이'인데, 생존을 위해서 사냥을 하는 게 아니라 장난을 치고 익살을 부리고, 그런 과정에서 예술이 탄생한다. 가장 멋진 인간적 행위가 아닌가 싶다."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됐던 일은 "인생에서 그냥 재미있는 해프닝이었다"고 치부한 천명관은 "50대 때 다시 영화를 하면서 10년간은 영화를 해보고 마지막은 소설을 쓰면서 남은 삶을 보낼 구상을 했다"면서 "밀려 있는 집필 스케줄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달려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앵벌이한 돈으로 허기를 몰래 달랜 아이를 양 목사가 귀신같이 적발하는 대목.
양 목사의 차가운 음성에 깜상이 엉거주춤 입을 벌렸다. 순간, 양 목사는 뱀처럼 긴 혀를 깜상의 입안에 거침없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죽그릇을 핥듯 혓바닥으로 입안을 구석구석 핥았다. 아이들은 그의 혀가 마치 자신들의 입안을 헤집는 듯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양 목사는 눈을 감은 채 쩝쩝 입맛을 다셨다. _ '럭키 서울'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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