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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직설] 이권집단의 위장용 브랜드로 전락한 '진보'

UPI뉴스
기사승인 : 2021-09-22 16:08:04
1980년대 운동권 지배했던 '조직보위론'
이젠 정권보위론, 이권보위론으로 변질
우리가 꿈꿨던 세상이 고작 이런 거였나
1980년대의 운동권을 지배했던 철칙 가운데 '조직보위론'이란 게 있었다. 조직보위론은 '진보의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운동조직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위'해야 하며, 따라서 내부에서 성폭력과 같은 몹쓸 짓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를 조직 밖으로 알려선 안 된다는 논리다. 바로 이 논리에 따라 운동권 내부의 많은 성폭력 사건이 철저히 은폐되었고, 피해자에겐 이중, 삼중의 고통이 가해졌다.

그런 조직보위론은 이젠 사라졌을까? 불행히도 아직 건재하다. 변호사 권경애가 최근 출간한 <무법의 시간: 어쩌다 우리가 꿈꿨던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나?>라는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권경애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노동운동을 하느라 대학을 입학한지 12년 만에 졸업했다. 그런 권경애가 느꼈을 아픔과 슬픔에 감히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80년대의 조직보위론이 아직까지 진보 진영에 건재하다는 게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조국 사태'에 대해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생각이 다를 땐 각자의 생각을 존중해주거나 차분한 대화나 토론을 통해 생각의 차이를 줄여나가면 될 것이다. 권경애의 모든 주장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견을 대하는 자세다.

그러나 조직보위론은 '닥치고 공격'만을 외칠 뿐이다. '조국 사태'에서 조국의 편에 선 사람일지라도 조직보위론에 대해선 분노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나는 '조국 사태'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권경애는 처음엔 검찰개혁을 열렬히 옹호하는 편에서 각종 담론을 생산해내는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그가 다른 지지자들과 다른 것은 그에겐 '조직보위'가 아니라 '진실과 정의'가 우선이었다는 점이다. 진영논리를 초월해 부당함에 눈 감는 게 어려운 성격도 그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는 점차 진실에 근접하면서 문재인 정권의 정략적인 검찰개혁에 비판적인 논조의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자 문 정권의 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압박과 회유를 하기 시작했다.

권경애가 페이스북에 비판적인 글을 올리면 글을 내리라는 압박이 가해졌지만 글의 내용에 대한 이성적인 문제 제기는 없었다. 이유는 단지 "윤석열을 쫓아내야지. 안 쫓아낼거야?"라는 식이었다. 어느 날 대학 운동권 선배들이 만나자고 했다. 선배는 "네가 요즘 많이 힘들까봐 보자고 했어"라고 했지만, 술자리에서 막상 들려준 말은 '출세하는 법'을 곁들여 업그레이드한 조직보위론이었다.

"너는 삶의 계획이 없어 보여. 조국사태로 정권을 잃을 수도 있지. 그래도 다시 또 권력은 와. 야당은 이미 흘러간 권력이야. 나는 너 같은 사람이 다음 정권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봐. 너는 이미 586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어. 전문가적 능력과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잖아. 너같은 사람이 다음 정권을 책임져야 해. 너는 어차피 이 정권 사람들과 같이 가야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이번 일에는 관여하지 마. 그냥 침묵하고 흘려보내라고. 너는 마음만 먹으면 비례대표든 뭐든 원하는 자리는 다 얻을 수 있어."

그러나 그런 압박과 회유에 흔들릴 권경애가 아니었다. 선배와 헤어진 후에도 비판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선배와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을 며칠 앞두고 확인차 전화를 했더니 선배가 내뱉은 말은 단 한마디였다. " 야, 너 볼 일 없다."

그래도 독재정권 시절의 물리적 폭력은 없다는 점에 기뻐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 시절엔 정권에 비판적인 활동을 해도 명예는 누릴 수 있었으며, 따라서 왕따도 없었다. 문 정권에선 다른 유형의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권경애의 페이스북에 그동안 '좋아요'를 눌렀던 사람들이 눈치 보여서 못 누른다고 했다. 동문회 카톡에서는 권경애와 관련한 기사나 얘기는 올리지 말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상한 일이다. 80년대의 조직보위론은 잘못된 것이었을망정 야만적인 독재권력으로부터 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그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게 정반대로 뒤집어졌다. 가장 강한 정권 권력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위'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 '적'은 야당만이 아니다. 과거에 진보적 운동을 했고 지금도 진보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문 정권을 비판하면 타도하거나 상종하지 말아야 할 '적'이 되고 만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쩌면 이건 경제적으로 분석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정권교체는 밥그릇의 전면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정권을 잡으면 수천 개의 고급 일자리가 전리품으로 떨어진다. 정권 권력에 발을 들였거나 어떤 식으로건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권보위론'으로 변질된 '조직보위론'은 사실상 '이권보위론'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럴수록 자기정당화를 위해 자신들이 '진보'임을 강하게 내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보'는 이권집단의 위장용 브랜드로 전락하고 만다.

사람들이 악하거나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역사는 때로 후퇴하거나 지그재그로 오락가락하면서 진보하는 것인데다, 소수나마 '소금' 역할을 하는 권경애와 같은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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