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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직설] 민주주의 갉아먹는 '선악 이분법'

UPI뉴스
기사승인 : 2022-05-09 11:14:19
사회 전체 차원에선 증오와 대립을 부추기는 해악임에도
개인 차원에선 행복감 고무하는 육체적·정신적 건강요법
우리의 건강염려증처럼 너무 지나친 건 아닌지 돌아봐야
"조직에서 나오기 전에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누가 나쁜 놈인지 알았다. 지금은 그런 확실함이 사라졌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는다."

청소년 시절 6년 동안 네오나치 집단에서 활동했던 바이스게르버라는 독일인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스물한 살에 그곳에서 빠져나온 그는 이후 교육과 강연을 통해 극우주의의 위험성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사회학자 라우라 비스뵈크의 ‹내 안의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슬그머니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을 실감나게 표현해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함이 사라지는 바람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도 있다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악 이분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악(惡)으로 여기는 법은 없다. 자신을 선(善)으로 간주하기에 선악 이분법을 쓰는 것이다. 이런 독선적 이분법은 행복감을 고취한다. 비스뵈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타인에게서 악을 보면 흑백 논리에 따라 자신의 세상은 자동적으로 선이 된다. 부정적 적개심이 긍정적 자아상을 불러낸다."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성향도 선악 이분법을 키우는 토양이 된다. 불확실성은 세상의 복잡성 때문에 불가피한 것임에도 우리는 그걸 피해갈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이와 관련, 비스뵈크는 "복잡한 것은 무섭고 골치 아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흑백논리와 함께 자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좋거나 나쁘고, 나를 사랑하거나 증오한다.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죄를 뒤집어씌우면 질서와 통제의 기분이 든다. 안전과 명료함의 욕망은 너무도 커서 아무 정보도 없는 것보다는 거짓 정보라도 듣는 편이 더 안심이 된다. 그럼 그 사건을 정리·정돈할 수 있으니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거 참 문제가 심각하다. 선악 이분법은 사회 전체 차원에선 증오와 대립을 부추기는 해악임에도 개인 차원에선 육체적·정신적인 건강요법이 될 수도 있다니 말이다. 혹 주변에서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특정 정치인과 세력을 악의 화신이나 되는 것처럼 비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가? 그 사람의 확신에 찬 표정과 어조에서 그 어떤 행복감이 느껴지지 않던가? 물론 동시에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는 평소 "이 세상을 4·6제나 3·7제로 보자"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정치사회적 논의나 논쟁에서 "나는 10, 너는 0"이라는 선악 이분법을 넘어서 "나의 옳음은 6이나 7"이라는 자세를 갖자는 뜻이다. 상대방에게도 "4나 3의 옳음"을 인정해줘야 소통이나 타협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안은 무력하다. 화끈한 박력을 과시할 수 있는 선악 이분법의 건강요법 기능 때문이기도 하다.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이 세상은 '확실하게 좋은 사람'과 '확실하게 나쁜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지는 않다. 그런 구분은 픽션의 세계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 세계에선 흔히 하는 말로 '거기서 거기'라고 보는 게 대체적으로 옳다. 하지만 우리는 공정한 평론가의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건 아니며, 그렇게 살아가는 게 성공이나 행복에 유리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사적 영역에선 편파성은 미덕이다. 나의 가족과 친구에게 편파적 애정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혈연·지연·학연 등을 중시하는 연고주의가 비판을 받는 건 그것이 공적 영역에서 발휘되는 경우에만 국한될 뿐, 사적 영역에서 연고주의는 행복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공사 영역의 구분은 이론으로만 엄격하게 존재할 뿐 그 경계는 늘 애매하고 자주 실종된다. 우리가 가끔 정치를 가리켜 냉소적으로 '밥그릇 싸움'이라고 부르는 건 정치인이나 정치 참여자들이 공(公)을 빙자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게 너무도 익숙하고 흔한 풍경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선악 이분법이 없는 나라는 없지만, 한국은 부족주의와 도덕주의가 강해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그게 비교적 강하게 나타나는 편이다. 앞으로도 선악 이분법이 기승을 부리는 걸 막아내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해는 제대로 하면서 살아가자. 그건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심리적 만족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익을 꾀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구사하는 정치마케팅의 건강요법 상술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희생으로 하는 것이며,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상과도 거리가 멀다.

한국인의 건강염려증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도 감안하는 게 좋겠다. 한국의 기대수명은 일본 다음으로 길고, 질병 사망률과 비만 인구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훨씬 낮지만, 정작 자기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OECD에서 가장 적은, 셋에 한 명꼴이다. 오죽하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한국인의 장수비결은 김치와 건강염려증이라고 비꼬았겠는가. 우리의 건강염려증이 지나치듯, '선악 이분법'이라는 건강요법도 지나친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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