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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 스러진 '연애소설 읽는 노인'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기사승인 : 2020-04-17 14:22:14
칠레 출신 세계적인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
코로나19 감염 6주 만에 스페인에서 사망
대표작 '연애소설 읽는 노인' 등 작품세계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환경운동에 오랫동안 종사했던 칠레 출신 세계적인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 그는 인간이 교란시킨 생태계의 왜곡된 산물인 코로나 바이러스에 희생됐다. [열린책들 제공]


아마존 밀림지대에 사는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이 노인은 글을 쓸 줄은 모르지만 읽을 줄은 안다. 1년에 두 번 밀림의 마을을 방문하는 치과의사에게 받은 연애소설을 읽고 또 읽는 그의 행위는 활자를 가슴에 심는 경건한 의식에 가깝다.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인 것은 당연하고, 어떤 책은 매번 읽을 때마다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돋보기가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정부의 꼬드김으로 밀림에 들어왔다가 개간에 실패하고 아내마저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남자. 그는 그곳의 자연과 동물들과 책과 더불어 살다가, 백인들에게 가족을 빼앗긴 암살쾡이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다. 노인은 복수에 눈이 멀어 죽음을 각오한 살쾡이를 어쩔 수 없이 죽인 뒤 밀림의 처녀성을 유린한 인간들을 저주하며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코로나에 스러졌다. 세풀베다의 저서들을 출간해온 바르셀로나의 투스케 출판사는 세풀베다가 스페인 북부 오비에도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고 16일(현지시각) 밝혔다. 스페인에 거주하는 세풀베다는 지난 2월 말 포르투갈에서 열린 도서 축제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코로나19 확진을 받은 뒤 2월 25일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아왔다. 향년 71세.

 

마르케스 보르헤스 등 1세대 뒤를 이어 '포스트 붐'세대로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새롭게 부흥시킨 세풀베다는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의 절친한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가 무장 괴한들에게 살해당하자 그동안 외지인의 과도한 관심을 막기 위해 쓰지 않았던 자신의 아마존 체험을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 담아 1989년 세상에 내놓았고, 문명의 야만과 환경의 중요성을 세상에 각인시킨 이 소설은 출세작이 되었다.


새끼들과 수컷을 잃은 아마존 밀림의 암삵쾡이에 이어 개도 등장한다. 장편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는 칠레 마푸체 족과 더불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개가 외지인들의 침략에 터전을 빼앗기고 사슬에 묶였다가 탈출하여 인디오들을 도와주며 죽는 서사다. 개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개가 인간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지닌 두려움의 냄새까지 명민하게 파악한다.


소설집 '외면'도 세풀베다에 대한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다 잊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추억을 건드려 울게 만들고, 허무와 부조리의 인생사에 한숨을 깊이 쉬다가 주저앉게 만든다. 권력과 탐욕이 만들어낸 정치지형이 양심적인 인간들을 어떤 공포로 몰아가는지 짐짓 태연하게 고발하는 대목에서는 지나온 우리 시대의 아픔을 다시 건드리기까지 한다. '사람'을 외면하고, '자신'을 외면하고, '흐르는 시간'을 외면하고, '사랑'을 외면하는 4개의 반어법을 동원해 사람과 자신과 시간과 사랑을 붙들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용해된 이야기들을 담았다.

 
이 밖에도 '모비 딕'에서 빌려 온 모티프를 뒤집어서 고래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연 파괴를 고발한 '지구 끝의 사람들', 칠레와 독일을 무대로 한 일종의 누아르 소설인 '귀향', 여행에 대한 정열과 이야기꾼 솜씨가 결합된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사랑이 부재하는 세계를 풍자한 '감상적 킬러의 고백', 동화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등을 남겼다.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2005년 한국에 왔던 세풀베다는 "채식주의자나 동물 애호가들이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소박한 단견"이라며 "환경 약탈은 국가 차원의 숨어 있는 계략 때문"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오래전부터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 일원으로 활동해온 그는 정작 인간들이 왜곡시킨 생태계의 산물인 코로나 바이러스에 희생되고 말았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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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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