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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당신이라는 감옥, 참 좋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기사승인 : 2023-03-25 11:55:26
여영현 시인 두 번째 시집 '그 잠깐을 사랑했다'
내 안의 상처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따스한 시선
"진짜는 무엇을 변하게 한다, 지나가거라 세계여"
우리는 같은 진동을 느낄 때/ 함께 운다/ 속이 비어 있는 것은/ 껴안고 울고/ 좁은 골목에선 바람도/ 막막해서 운다

시인은 우리가 타자를 타자로만 보면 절대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사람의 정서에 맞추고 그 사람을 생각했을 때, 그 사람의 아픔이 내것 아니냐고 했다. 두 번째 시집 '그 잠깐을 사랑했다'(천년의시작)를 펴낸 여영현 시인이 이번 시집에 수록한 '공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울음은 더 큰 소리로 이어진다.

▲'밤바다를 낚다'에 이어 두 번째 시집을 펴낸 여영현 시인. 그는 "너무 할 말이 많으면 일렁이게도 되고, 너무 아프면 반짝이게도 된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일주일 째 노파가/ 보이지 않았다/ 손수레 바퀴처럼 삐걱거리던 속울음이/ 덜컥 멈춘 것이다// 비바람이 골목길에 몰아쳤다/ 비닐봉지는 젖은 채 울고/ 수거해 갈 사람이 없는 빈 병은/ 더 큰 소리로 울었다.

2004년 시인으로 나선 이래 오래 침묵을 지키다 14년 만에 첫 시집 '밤바다를 낚다'를 낸 이후 이번에 다시 상재한 시집은 시인 안의 상처에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따스함을 나누려는 시편들이 눈에 띈다. 그는 "모든 게 순간일 뿐"이라면서 "너무 할 말이 많으면 일렁이게도 되고, 너무 아프면 반짝이게도 된다"고 서문에 썼다.

너무 할 말이 많으면 일렁이게 된다/ 너무 아프면 반짝이게도 된다// 배들이 떠나갈 때/ 물 자취가 길다/ 그게 배들의 운명 같기도 하고,/ 미련 같기도 하다// 아주 큰 스크루를 달고도/ 깊은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은/ 속도가 느리다// 살면서 가장 아름다울 때는,/ 죽고 싶을 때였다/ 먼 섬들이 편도처럼 부었다// 미련이 많으면/ 바다가 깊다/ 허무해서 돌아보면/ 더 깊다. _'사랑이 그렇게 지나갔다'

숙명적으로 '섬'은 떠나가는 이들을 속절없이 보내야 하는 처지. 시인의 먼 섬들이 편도처럼 부어 있는 까닭이다. 이번 시집에는 대체로 '따뜻한 남쪽'에 대한 그리움이 깔려 있다. 시인의 '남쪽'은 위로와 사랑이 있는, 오랜 갈망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에게 살면서 가장 다행인 건 "흙이든 사람이든/ 서로 꼭 붙드는 것"('토마토는 따뜻하다')이고,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지만/ 당신이라는 감옥/ 참 좋았다"('비문증飛蚊症').


나는 불의 뿌리,/ 출렁이는 파도였다// 햇빛은 대기 속에 지층을 만들고/ 내가 노래하고 춤추던 자리에도/ 빛의 퇴적이 남았다// 해안선 끝까지 밀려오던 물결,/ 불꽃이 소실될 때 어둠은/ 또 얼마나 다정했던가,// 나는 등뼈가 가지런한/ 화석이 되고 싶다// 당신 곁에 눕던 이생의/ 등뼈// 짧아서 환했던 흔적이다. _'환생'

시인은 "짐승들은 다쳤을 때 울지 않는다/ 끊임없이 스스로 상처를 핥을 뿐"이라면서 "우리는 모두 눈밭을 건너고 있다/ 살아서 수고 많았다/ 발자국마다 홍매가 핀다"('겨울 홍매')고 위무한다. 살아서 수고가 많은 이들이 어디 한둘일까. 스스로 다독이고 바깥을 향해 위무의 말들을 던지지만, 여전히 '수렵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무한 질주 세태에 대한 비탄은 멈출 수 없다.

자유로는 강변북로와 연결되었고/ 절벽 어디선가 강으로 꺾인다// 추락한 사람들은 귀가 시간이 늦다/ 간혹 죽음은 유선으로 통보되었다// 여자는 동굴에서 혼자/ 아이를 낳는다/ 눈이 내리고 가계부에는/ 빙하기라고 적는다// 타제석기는 깨어진 쪽이 날카롭다/ 사람들은 상처를 주기 위해/ 예리해진다/ 손목을 그은 손들이/ 피를 흘린다/ 도시의 십자가는 습관적으로/ 붉다// 짐승의 발자국을 쫓느라/ 너무 멀리 왔다 돌아오지 않는 발자국이/ 눈보라 속에 묻혔다// 남자의 산재 연금이 나오던 날,/ 여자는 동굴의 불을 밤새/ 끄지 않았다. _'수렵시대'

한국이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이고, 젊은 세대 사망 원인 1위 또한 그 '참혹'임을 떠올리면 새삼 망연해질 따름이다. 대학에서 행정학, 그중에서도 조직론을 전공한 교수로 살아가는 시인은 최근에는 왜 한국인은 유독 더 불행한지 북유럽과 일본 등지를 답사하며 연구에 몰두하는 중이다. 그는 이즈음에는 육체노동자들뿐 아니라 산업재해 판정도 받지 못한 채 과로사하는 사무직 노동자들 실태도 심각하다고 했다.

시인은 "칠흑 같은 바닥에 불을 놓는다/ 나의 뇌가 남김없이 타고 나면/ 그렇게 불릴 것이다// 지식노동자"('향유고래')라고 쓰고 "왜 사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가속의 페달을 밟아,/ 속도계 바늘처럼 온몸이 떨리네// 내 몸을 으깨어 만든 별 하나,/ 지금 유리창에 달라붙어/ 바람에 춤추고 있네"('질주하는 의문')라고 탄식한다.

▲짬이 날 때마다 바다로 가는 여영현 시인은 "먼 섬들이 편도처럼 부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여영현은 "요즘 들어서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이전에는 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이제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주는 따뜻한 말을 건네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시를 위한 시는 쓰지 않겠다"면서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잠깐' 오래 남을 불씨를 심고 싶다"고 덧붙였다. 핀란드에서 아내에게 보낸 온기 가득한 노래.

한때 내 영혼의 공장이었던 육체가 죽었다/ 백야의 밤이 그렇다/ 나의 몸은 나무가 먹어 그 에너지는/ 나무가 되었다// 식탁이나 의자가 되어 너를 만났으면 좋겠다// 너의 온기가 전달되면 우리가 입 맞추던/ 부드러운 혀를 느낄 것이다// 요행이라면 나의 어느 부분은 먼 북구,/ 순록이 먹는 이끼가 될 것이다/ 맑은 짐승의 동공, 그 투명한 단백질이 되어/ 별을 보고, 오로라를 볼 것이다// 그때도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너와 함께라면 하고/ 아쉬워했을 것이다. _'핀란드의 북쪽'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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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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