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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문학공간]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는 축복 같은 이야기"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Google구글에서 선호하는 출처로 추가
기사승인 : 2026-07-31 17:18:28
신작 소설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 펴낸 전경린
유년기 마을 공동체 삶을 감각적 서정적으로 풀어내
여러 아픈 사연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긍정하는 힘
"당신들이 산 삶이 내 머리 위로 축복처럼 쏟아졌다"

'누구나 자기 생의 밑바닥에는 휘황한 보석이 깔려있을까?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서, 내 기억의 가장 깊은 바닥에 깔린 감꽃들은 보석인 양 휘황하게 빛나고 있어. 저 멀리 어린 시절에 묻어두었던 보석의 황금빛 광휘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해. 그때 그 아이가 정말 나였을까,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 오랜만에 신작을 펴낸 소설가 전경린. 그는 "존재의 바닥에 깔린 휘황하게 빛나는 보물을 생의 마지막까지 혼자 간직하고 싶기도 했다"고 썼다. [김영사 제공]

 

누구에게나 첫 기억이 시작되던 장면이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울고 기어다니고 아장아장 걷던 장면은 사진으로나 볼 수 있을 뿐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다. 처음 뇌리에 각인된 풍경은 적어도 기억 속에서는 비로소 '살기 시작한' 하나의 세상일 터이다. 그때부터 기억은 시작됐고, 아이는 자랐고, 수많은 일이 일어난 삶을 지나왔을 것이다. 전경린은 최근 펴낸 소설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김영사)에서 노년에 이르러 꺼내본 그 기억의 광휘를 '보석'이라고 일컬었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흙으로 덮여버린, 오래된 나선형의 기억을 따라가야 할 것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세월이 지나 왜 나는 다른 내가 아니고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되새긴다. 오랜 시간이 흘러 변해버린 '나'는 유년의 그 아이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그가 유년의 마을을 소설로 옮기면서 그 아이 이름을 본명 안애금이나 필명으로 거느려 온 전경린이 아닌, '새별'이라고 지은 이유다.

염소를 몰고 가출해 기성 관습에 맞서 사랑과 정념의 서사를 펼쳐온 전경린 소설의 빛깔을 감안하면, 오랜만에 펴낸 이번 작품은 색다르다. 아이를 주인공으로 세워 유년기 마을 공동체를 감각적인 서정으로 풀어낸다. 아버지를 따라 고향 마을로 이사 오며 생애 첫 기억의 눈을 뜬 어린 소녀 '새별'이가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전쟁과 가난의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성장해 간다. 어른들이 견뎌낸 모진 삶과 상처의 공동체 속에서 새별이의 유년은 생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축복으로 각인된다.

-이번 소설을 "쓰지 않으려고 꽤나 버텼다"고 적은 배경은? 
"작가라는 사람에게는 그냥 자기도 모르게 슬슬 들어와서 안에 쌓이는, 저절로 생각이 가서 머물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유년 시절 기억이 살짝살짝 떠올라 좋은 기분을 느꼈다. 가슴에 꽉 차게 되면 내놓을 수밖에 없겠지만, 소설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그 기억을 변형시키고 조각을 내서 결국 이야기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쓰게 되면, 깨지고 부서지고 훼손되기 마련이다. 나만의 경험이 공적인 영역에 들어가서 소비돼버린다는 점에 저항감이 있었다. 안 쓰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아마 청탁이 없었으면 가슴에 쌓아둔 채 계속 미적거리고 있었을 것 같다."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는 이야기만 하기로 했다고 썼다. 전경린 소설이 달라지는 건가.
"지금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바뀌긴 바뀔 것이다. 이번 소설을 쓸 때는 어린이가 주인공이고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다 보니, 감정을 절제하고 가볍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람은 어느 시기가 되면 꼬리를 무는 것처럼 원형적인 기억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어느 시점으로 기억이 다시 돌아가는 그런 흐름을 말한 것인데, 실제 내 유년기 기억들이 모두 들어간 것은 아니다. 몇 개의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덧붙여 만들어냈다."

'그 마을은 사과 속의 씨앗처럼 세상에서 꼭꼭 숨어 있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감꽃으로 덮인 길이야. 누가 부려놓은 듯, 마을 안길이 온통 감꽃으로 덮여 있었지. 감꽃은 흔히 미색이라고 하는 연한 노란색이야. 태어나 처음 입는 배내옷같이 옅고 흐린 색, 그건 초유의 색이기도 해. 동생을 업은 엄마는 물동이를 이고 우물로 가고 있어.'

-감꽃이 생의 첫 빛깔로 상징되는 원형 공간 입구가 인상적이다. 아픈 사연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체를 '낙원'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아버지가 고향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아이는 어른들이 힘들게 살아낸 그 공동체의 삶에 갑자기 초대된 셈이다. 상처가 깊은 마을이어도 그 아이에게는 낙원이었다. 그곳에 놓이자마자 친구와 언니와 할머니가 생기는 관계, 그것이 바로 축복이다. 천륜을 감추고 사는 할매가 새별이에게 건네는 홍시의 따스함은 유년기에 형성된 가장 근원적인 힘이다. 돌아볼 때 유년을 둘러싼 환경을 긍정하기는 쉽지 않다. 세월이 더 흘러야 가능한데 그 시절을 긍정할 때 존재의 바닥으로부터 빛이 생긴다. 이 마을도 부정적으로 보려면 굉장히 슬프고 아프고 상처투성이지만, 살고 살아서 때가 되면 그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이 된다."

- 어느 때가 돼야 지난 시절을 긍정할 힘이 생겨날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열 살에도 생기고, 어떤 사람은 마흔이나 쉰, 다 다를 것 같다. 긍정에 이르는 그 길은 어려운 삶의 과정일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진짜 사랑'을 알게 되는 때가 전부 다 다른 것처럼… 이게 사랑이다, 저게 사랑이다, 그러면서 살지만 어느 때가 되면 말없이 알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지 않나."

-'진짜 사랑'이 뭔지 이제는 알게 된 건가.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다. 알게 되면 말이 없다. 불가능한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가능한 사랑만 사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사랑을 가능하게 만들어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테고…. 지금은 사랑에 대해 생각하기 싫다. 어떤 느낌으로 자꾸 다가오긴 하는데, 아직 말로 하고 싶지는 않다."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는 미선이 말대로 직접 들어봐야 알 수 있는 소리였다. 그날 순지 고모는 깊은 숲속에 보슬비 내리는 소리라고 했다. 새별이는 엄마가 방 안 가득 이불을 펼쳐놓고 풀 먹인 홑청을 기우는 소리 같았다. 무명실이 바싹 마른 홑청을 뚫고 지나가는 소리를 천 개쯤 모은 것 같은 소리였다. 새별이가 오빠에게 배운 천 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수였다.'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감각적이고 미세한 서정의 소리가 활자로 연주되는 듯하다. 전경린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그의 감각적인 문장일 터이다. 새별이가 울다가 별을 보면서 울음을 그치는 장면이나, 동전을 삼킨 뒤 맑은 이슬이 반짝거리는 아침 풀밭에서 똥을 누는 풍경은 작가에게 특히 애착이 가는 대목들이라고 했다.

-'당신들이 산 삶이 내 머리 위로 축복처럼 쏟아졌다'고 썼다.
"아까 말한 것처럼 삶 전체를 긍정하는 순간이 이 소설의 핵이기 때문이다. 전쟁도 겪으면서 윗세대가 정말 온 힘을 다해 살아낸 그 삶이 내가 태어났을 때 마치 세례를 받는 것처럼 나에게 쏟아진 것이다. 그 안에는 물론 상처도 있고 비극적인 것도 있지만 그 전체를 긍정한다는 의미, 내가 머리 위로 받은 것들을 다 긍정한다는 그런 마음으로 썼다."

 

▲ 전경린은 "요 몇 년은 삶이 나를 좀 놓아줬다"면서 "시간을 가만히 흘려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나무위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에 당선돼 소설가의 길을 걸어온 전경린은 장편만 14권을 펴냈다. 소설집과 산문집, 동화까지 합치면 30년 가까이 1~2년 간격으로 책을 펴낼 정도로 쉼 없이 써온 셈이다. 그동안 예전에 썼던 소설을 개작해서 복간하는 작업도 했지만, 200자 원고지 300장 남짓의 이번 소설은 오랜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이전에는 "쓰는 게 본능이고, 쓰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기관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던 그가 "요 몇 년은 삶이 나를 좀 놓아줬다"면서 "시간을 가만히 흘려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쓰면 계속 비슷한 내용을 반복할 것 같아서 당분간 안 써보자는 마음이었다"면서 "안 쓰고는 가슴에 너무 차올라 참을 수 없을 때 또 쓰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별'의 낙원을 접하면서 누구나 자신만의 휘황한 보석을 발견하기 바란다는 작가의 말.

'아무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이 기분 좋은 이야기만 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아픈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으니까요. 이건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서 생겨난 이야기이고, 평생 내게 힘이 된 시절에서 나온 이야기니까요.'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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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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