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뉴스 - [조용호의 문학공간] "읽는 사람은 다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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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 2026-09-04 10:54:50
산문집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펴낸 박준 시인
한국 현대시사 관통하는 66명 시인의 시에 붙인 산문들
해설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자유롭게 '오독'한 명징한 글
"자유롭게 읽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쓰는 사람은 다 가지지 못한다. 한창 울고 있을 때 내 울음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일과 같다. 대신 읽는 사람은 다 가진다. 결국 우리에게 닿는 것은 짙은 바다가 아닌 흰 파도인 것처럼. 별이 아닌 별빛인 것처럼. 욕망의 입이 아닌 사랑의 말인 것처럼. _ '읽는 사람은 다 가진다'
 

▲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로 67쇄를 찍으며 폭넓게 독자들과 만나 온 박준 시인. 이번 산문집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동력을 찾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문학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작가의 의도와 가장 가까워질까. 그럴 필요는 있을까. 인공지능에 텍스트를 입력하고 분석을 요구하면 수초 만에 '모범답안'을 내놓는 시절에 문학은,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난다)는 '오독의 자유'를 설파하는 박준 시인의 산문집이다.

이 책은 1896년생 김명순부터 1995년생 김남주까지, 100년에 걸친 한국 현대시사 속 시인 66명의 시 67편에 박준 시인의 산문을 나란히 덧붙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시 해설서나 연구 논문 형식이 아니라, 시를 곁에 놓고 그 시가 촉발한 느낌이나 아우라를 자신만의 경험과 추억과 감성으로 자유롭게 변주한 산문집이다.

박준은 서문에서 "나는 한때 읽는 일에 영향받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면서 "냉철하게 아름답고 흐드러지게 슬픈 길을 따라 걷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답이 아닌 전에 없던 오답을 구하며 읽었다"고 썼다. 그는 "시와 문학이라면 내게 가장 드넓고 견고한 불가해의 세계를 만들어줄 거라 믿으며 얼마간의 문장이나 낱말 몇 개만을 손에 꼭 쥐고 먼 길을 가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가 읽는 사람의 '자유'를 북돋은 배경이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때 / 개천가에 고꾸라졌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오. / 그래도 부족하거든 /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_ 김명순, '유언'

김명순(1896~1951)의 처절하고 결연한 이 시를 두고, 식민지 조국의 가부장적 질서와 당대 문단과 사회의 억압 속에 살다간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박준은 산문을 쓰지 않는다. 그는 "물가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떠올리며 아이는 마냥 즐거워하지만 이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위태로움에 깜짝 놀라게 된다면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의 물가에서 오래도록 혼자 놀았던가"라고 묻는다. 절규하는 듯한 '유언'과는 사뭇 다른 빛깔이다.

박준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선구자적 페미니스트로서 겪었던 당시의 한탄이나 저주 같은 것을 저의 언어로 변주하면서 왜 이런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고 당시의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전근대적이었는지 얘기하는 건 저의 방식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들을 너무너무 얘기하고 싶지만 저 나름대로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 이 산문"이라면서 "'물가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는 어떻게 보면 저의 방식으로 순화해서 맥을 같이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 '읽는 사람은 다 가진다'고 쓴 배경을 부연한다면?
"해석을 선점해버리면 나머지 독자들이 '아,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이구나'라고 어떻게 보면 이 틀 안에 갇힐 수가 있을 텐데, 자유로운 시인의 영혼으로 내가 이렇게까지 오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악의를 가지고 책을 읽는 사람 혹은 문학을 접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작품에서 느끼는 감상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것이고, 오히려 오독이 가장 아름답게 혹은 자유롭게 사용되는 장르가 시가 아닐까. 이런 자유로움을 선점하지 않고 '아, 너는 이렇게 읽는구나'라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인들을 선별한 기준은?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일 것, 또 하나는 현재나 어쩌면 미래에도 생산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시와 시인일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문학작품의 해석과 분석은 제 영역이 아니고, 많은 독자들이 시를 좋아하지만 맨 끝에는 늘 '현대시는 어렵다'고 하는데, 분석과 감상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이 구별을 좀 분명하게 하고 싶었던 의지도 담았다. 아주 오랫동안 '문학의 위기' 혹은 '시의 위기'라는 말이 쭉 따라붙었는데, 저는 위기가 아니다, 진짜 위기는 읽히지 않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가 쓰이지 않을 때 오는 것일 텐데, 좋은 시는 이렇게 쓰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손을 내밀면 /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 내가 볼을 내밀면 /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 자꾸자꾸 자라나 / 다람쥐 꼬리만큼은 자라나 / 내 목에 와서 감기면 /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 그녀와 주고받고는 했던 / 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_ 김남주, '창살에 햇살이'

군사독재 시절 온몸으로 현실에 맞섰던 김남주(1946~1994) 편에서는 교도소 독방의 창살 틈으로 비쳐드는 한 줌 햇살을 두고 쓴 시를 박준은 골랐다. 그는 이 작품이 김남주 시인의 면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시대와 완전히 호흡하고 조응했던 시들은 그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사라지는구나"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 시편에 덧댄 박준의 산문은 옷에 대한 이야기로 변주된다. '언제쯤이면 옷에 묻은 슬픔이 마를까요? 그때쯤이면 입어볼 수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산문을 쓸 때 경계한 원칙은?
"마냥 자유롭게 이 시를 읽고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고 하는 건 무책임한 것이다.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문장 혹은 어떤 사유, 혹은 주요 낱말이라도 그것을 놓지 않고 멀리 가고 싶었다. 그냥 서로 상반된, 혹은 서로 그렇게 연관이 없는 산문을 붙이는 건 좀 경계했다. 그 산문이 멋있게 쓰인, 마음에 드는 산문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이것을 읽어보면 '아, 이런 결을 가지고 이 산문이 이어졌구나' 정도는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산문 쓰기의 원칙이었다."

 

-시가 온전히 소비되지 않고 한 구절이나 시구만 SNS를 통해 공유되는 방식에 대한 우려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반갑다. 길 가는 사람들이 시집을 들고 다니는, 굉장히 넓은 독자층에게 어필하는 시의 시대가 있었다. 일종의 계단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그런 류의 시에서 만족하지 않는 독자들은 한 계단씩 더 깊이 걸어 들어올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시가 분절돼서 소비되는 방식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새로운 시인들이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는 동력은 거기에서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본다. 이번 산문집도 표본을 따서 마치 나무 해오듯이 한 가지씩 가져왔지만, 온전한 시집을 통해 시가 읽히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장기적으로도 바른 형태일 것이다. 선집을 내면서 시인의 개별 시집을 읽자고 말하는 게 상충되지만 그것이 목표이기도 하다." 

 

▲ 제작자로 참여한 '난다' 대표 김민정(오른쪽) 시인은 "기쁨이나 슬픔에 아랑곳없이 저 너머를 바라보는 뻣뻣한 자세가 좋아서 표지 그림으로 소녀가 창밖을 보는 이대원의 '창변'(窓邊)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 산문집의 마지막 시인은 아직 첫 시집도 내지 않은, 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또 다른 김남주이다. 굵직하고 의미 있는 한국 현대시사의 시인들 중에서도 빼고 넣는 일이 힘들었을 텐데, 말미에 이런 신인을 배치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21세기 김남주(1995~)의 아버지는 저항시인 김남주를 좋아해 딸에게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이 젊은 김남주의 시가 한국 현대시에 대한 하나의 은유처럼 느껴지기를 기대했다고, 박준은 말했다.

울지 마 울지 마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모두 혼내주자 / 그게 설령 우리를 낳아준 사람이라도 // 이 도시는 깨끗해서 외롭고 / 무엇인가 오고 있어 //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재난 경보 문자들 / 일기예보처럼 읽어내는 재난 말고 // 고개를 돌릴 때마다 선명해지는 / 나를 웃기기 위한 해괴한 표정과 자세 말고 // 뒷덜미에 울리는 숨소리 / 과장된 웃음소리 // 오고 있어, / 무궁하고 무진하고 꽃 같은 것들이 _ 김남주 '졸업반'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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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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